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우르바노6세

Mintaka5 2025. 5. 2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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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olomeo Prignano)

202대 교황 우르바노6세(Urbanus PP. VI, 1318~1389, 재위1378~1389)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01대 교황 202대 교황 203대 교황
출신 프랑스, 리모주 나폴리 왕국, 이트리 나폴리 왕국, 나폴리
명칭 그레고리오11세
Gregorius PP. XI
우르바노6세
Urbanus PP. VI
보니파시오9세
Bonifacius PP. IX
생몰년도 1330.05.09 ~ 1378.03.27 1318.xx.xx  ~ 1389.10.15 1350.xx.xx ~ 1404.10.01
콘클라베기간 2일
(1370.12.29~1370.12.30)
3일
(1378.04.07~1378.04.09)
9일
(1389.10.25~1389.11.02)
재위 1370.12.30 ~ 1378.03.27 1378.04.08 ~ 1389.10.15 1389.11.02 ~ 1404.10.01

우르바노6세
교황 우르바노6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18년 나폴리 왕국 이트리(Itri)에서 아버지(미상)와 어머니(미상)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02대 교황으로, 70여년간의 긴 아비뇽 유수(1309~1378)가 끝나고 난뒤 이탈리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에 오르는 인물이고 추기경이 아닌 직위를 가진 인물(프리냐노는 대주교)로서 마지막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기도 하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11세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이전에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에서 머물며 프랑스 추기경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어 즉위한 뒤 성직매매를 근절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하기위해 노력했지만, 이후 추기경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상당히 완고하고 권위적인데다가 추기경들의 혜택과 기본적인 보수까지 건드리면서 막말을 하게 되면서 극도로 분노에 찬 추기경들이 모여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를 선출하게 되면서 40년간의 긴 서구 대이교(1378~1417)를 열게되는 인물이다. 

 

성직

I. 교육

고향 이트리에서 수사로서 교육을 마치고 아비뇽 교황청에서도 신학 공부를 함과 동시에 사제가 되고, 1364년 교황 우르바노5세(Urbanus PP. V, 1310~1370, 재위1362~1370)로부터 대주교에 서임된다. 이전에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에서 좋은 평판을 얻은 프리냐노 대주교는 1368년 아비뇽으로 이주하여 머물면서 사목활동과 더불어 아비뇽 교황청에서 사실상 일을 하지만 1378년 그레고리오11세(1329~1378, 재위1370~1378)가 선종하면서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II. 8성인 전쟁

이 전쟁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였는데,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11세가 교황령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한 정책을 써서 피렌체 공화국이 흡수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영토를 교황이 빼앗고자 했고 이전에 교황이 비스콘티 가문을 칠 때 피렌체가 군사 지원을 거부한 것을 빌미삼아 이곳을 공격하고 1375년까지 전쟁이 지속되어 피렌체는 수년간 경제문제를 가지고 특히 곡물 문제가 심각했다. 거기다가 1375년부터 아비뇽 교황청이 긴 아비뇽 유수(1309~1378)를 마치고 로마로 곧 돌아올 거라고 보고한 교황 대사들은 아비뇽에서 임무를 마치고 볼로냐에서 다른 별개의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그 때, 수년간 전쟁으로 곡물이 바닥난 피렌체에서 곡물을 요청하는 서신이 도착하였는데 대사들은 요청을 거절한다. 이는 피렌체를 약화시켜 후일 피렌체를 정복시킬 때 수월하게 정복하기위한 수법이였기에 이에 분노한 피렌체인들은 교황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피렌체는 1375년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 시뇨리아가 임명한 8명의 위원회에 위임된다. 아래 표는 피렌체 시뇨리아가 임명한 8명의 전쟁 위원장이다. 

  생몰년도
알레산드로 바르디, Alessandro Bardi ? ~ 1383
조반니 디니, Giovanni Dini ? ~ ?, 향신료 소매업자
조반니 마갈로티, Giovanni Magalotti 1330 ~ 1377.07.15
안드레아 살비아티, Andrea Salviati 1340? ~ 1386,  수도원장 
구찌오 구찌, Guccio Gucci 1313 ~  1386?, 나폴리 왕 카를로3세 왕실 사절단
톰마소 스트로찌, Tommaso Strozzi ? ~ 1395
마떼오 솔디, Matteo Soldi 1322 ~ 1402, 와인 소매업자
조반니 디 모네, Giovanni di Mone 1330? ~ 1380, 곡물 사업자

피렌체가 완강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자 교황 그레고리오11세는 즉시 피렌체 정부 인사들을 파문시키고 유럽 전역에 피렌체의 모든 피렌체인에 대한 금지제재를 선포하여 사실상 약탈, 살인, 노예화를 합법화시키기에 이르고 경제까지 제제하여 압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교황의 조취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시민들은 프라티첼리 조직을 창설하고 반 교황 행위를 하면서 내부적으로 뭉친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력으로는 상위권에 속하던 피렌체를 경제 제재한 결과 피렌체 상인들이 피렌체를 떠나 경제흐름이 막히게 되면서 이는 유럽 전체의 경제에 문제를 주게되는 것으로 확장되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오11세는 이러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제재를 풀지않았지만 유럽 내 카톨릭 군주들은 교황의 금지제재를 무시하여 경제 문제에 손상이 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후 1377년 피렌체가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 배상금 35만 플로린을 지불하고 금지제재가 해제됨으로서 끝난다. 

8성인의 전쟁의 8명의 성인은 피렌체의 8명의 전쟁 위원장을 뜻하며 피렌체를 구하러 떠난 8명의 성인이라고 부르짖은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나오게 된 말이다. 

 

1378년 콘클라베

1378년 3월 27일 교황 그레고리오11세가(Gregorius PP. XI, 1330~1378, 재위1370~1378)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8성인 전쟁이 끝난 직후에다가 70여년간의 긴 아비뇽 유수(1309~1378)가 끝나고 열린 최초의 콘클라베였다. 총23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16명이 참석하고 7명이 불참한 콘클라베는 1378년 4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투표가 실시되는데, 처음으로 프랑스 추기경단과 리모주 추기경단들과 연합 구성되어 수십년간의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길게 콘클라베를 끌 생각이 없던 추기경단들은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 대주교가 이전에 프랑스에서 살았어서 프랑스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여 지지를 선언하면서 4월 9일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명은 우르바노로 명명하고 우르바노6세로 즉위한다. 

 

교황

I. 완고한 교황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에는 성직매매를 근절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통합 콘클라베를 치룬 프랑스 추기경들을 다독이는등 얼마동안은 공정한 시스템을 갖추기위해 노력했지만, 이후 점점 추기경들에게 막말이 심해지고 강압적이고 완고하게 추기경들에게 여러가지 꼬투리를 잡으면서 비난을 서슴치않게 하면서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8월쯤부터 아나니에 모여 회의를 한 다음 폰디로 자리를 옮겨 회의를 거듭한 결과 교황 우르바노6세의 선출이 무효하다고 선언해버린다. 

 

II. 교황 선출 무효 선언

프랑스 추기경들은 애초에 1378년 4월에 실시된 콘클라베부터 잘못되었다는 명분을 틀어쥠과 동시에 콘클라베때 로마인들이 비이탈리아 출신 교황이 선출될 경우 추기경을 살해할 위협까지 해서 잘못 선출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최종적으로 1378년 9월 20일 프랑스 추기경들은 프랑스 왕 샤를5세(Charles V 'le Sage', 1338~1380, 재위1364~1380)의 사촌인 로베르 드 제네바(Robert de Genève)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현재 카톨릭에서 대립교황으로 분류되고있는 아비뇽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Antipope Clemens VII, 1342~1394, 대립교황1378~1394)를 선출하게 되면서 40년간의 긴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이 일어나게 된다. 

 

III. 서구 대이교 촉발

1378년 사실상 우르바노6세로부터 촉발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서방교회 대분열은 첫 시작점부터 불꽃튀게되는데,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르바노6세는 극도로 분노하여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를 파문시키고 24시간도 안되는 시간동안 26명에 달하는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시키고 앞으로 벌어질 마찰에 대비하기 위해 전쟁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게 된다. 결국 1379년 3월, 우르바노6세는 교황군을 이끌고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를 공격하였고 압도적인 군세에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대립교황은 나폴리 왕국으로 도망쳐 동맹관계에 있던 나폴리 왕국 여왕 조안나1세(Joanna I, 1325~1382, 재위1343~1381)를 찾아가 협력을 요청하는데, 교황 우르바노6세는 대립교황과 손잡은 이들은 모두 파문시켜버리겠다는 마인드로 나폴리 왕국 섭정 조안나도 파문시켜버리고 1381년 새로운 나폴리 왕으로 카를로3세(Carlo III di Napoli, 1345~1386, 재위1382~1386)를 승인시키지만 정식 군주가 되지는 못하는 상황이였다. 이런 반전상황에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는 자신이 있던 아비뇽 교황청에서 프랑스 왕 샤를5세의 친동생인 루이1세 당주(Louis Ier d'Anjou, 1339~1384, 재위1360~1384)를 나폴리 왕으로 임명시키고 루이로 하여금 카를로3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앉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카를로3세는 모든 방해요소가 전임자인 조안나1세로부터 왔다고 인식하고 1382년 5월 조안나1세를 암살하고 나폴리 왕으로 정식 즉위를 선포한다. 예상치못하게 상황이 흘러가면서 전투준비가 늦어진 루이는 1384년 나폴리 침공을 시도하여 나폴리에 당도하지만 전투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르바노6세는 이후 나폴리 왕 카를로3세가 1386년 사망하면서 나폴리 정복 의도까지 품게 되면서 대분열은 점점 심해지게 된다. 이후 나폴리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카를로3세의 아들 라디슬라오(Ladislao I di Napoli, 1377~1414, 재위1386~1414)가 즉위하고 나서도 앙주 공작 루이1세의 아들 루이2세(Louis II d'Anjou, 1377~1417, 앙주재위1384~1417, 나폴리재위1389~1399)와의 경쟁도 더욱 격화된다.

 

선종

1389년, 행군중 교황 스스로가 타고 있던 노새에서 낙마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면서 살짝 회복하여 직무를 수행하지만 10월 15일 갑작스럽게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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