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알폰소 데 보르하 오 보르자(Alfonso de Borja o Borgia)
209대 교황 갈리스토3세(Callistus PP. III, 1378~1458, 재위1455~1458)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08대 교황 | 209대 교황 | 210대 교황 |
출신 | 제노바 공화국, 사르차나 | 발렌시아 왕국, 카날스 | 시에나 공화국, 코르시냐노 |
명칭 | 니콜라오5세 Nicolaus PP. V |
갈리스토3세 Callistus PP. III |
비오2세 Pius PP. II |
생몰년도 | 1397.11.15 ~ 1455.03.24 | 1378.12.31 ~ 1458.08.06 | 1405.10.18 ~ 1464.08.14 |
콘클라베기간 | 3일 (1447.03.04~1447.03.06) |
5일 (1455.04.04~1455.04.08) |
4일 (1458.08.16~1458.08.19) |
재위 | 1447.03.06 ~ 1455.03.24 | 1455.04.08 ~ 1458.08.06 | 1458.08.19 ~ 1464.08.15 |
출생
1378년 12월 31일 발렌시아 왕국 카날스(Canals)에서 아버지 후안 도밍고 데 보르하(Juan Domingo de Borgia, 1358~1427)와 프란치나 마르티 란솔(Francina Marti Llançol, 135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09대 교황이자 교황 역사상 최초의 스페인 출신 교황이다. 뛰어난 외교력으로 이전 교황들과 아라곤 왕 알폰소5세등에게 인정받아 1455년 니콜라오5세를 이어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상당히 완고한 성격과 타협을 모르는 성정으로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1세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 출신들에게 성직위를 매매하고 자신의 주변만챙기는등 족벌주의로 인해 로마의 여론이 악화되게되는 장본인이다.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 대해 오스만 십자군을 유럽 군주들에게 호소하지만 군주들의 소극적 행보로 실패로 끝난다.
성직
어린 시절 고향 발렌시아 왕국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1392년 례이다 대학교(University of Lleida, 현 스페인 카탈루냐 례이다에 위치한 종합대학교)에 들어가 법학(민법, 교회법)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다음 모교 례이다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에 임용되면서 후학들에게 법학을 가르친다. 외교에 능력이 출중하던 알폰소는 당시 아라곤 군주 아래에서 외교업무를 봤는데, 알폰소의 외교 능력을 높게샀던 아라곤 귀족이자 대립교황인 베네딕토13세(Antipope Benedict XIII, 1328~1423, 대립교황재위1394~1423)가 알폰소를 례이다 교구 교구장에 임명시킨다. 1416년에는 한창 진행중인 콘스탄츠 공의회(당시 로마왕이던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가 서방교회 분열을 수습하기위해 소집한 공의회, 1414~1418)에 례이다 교구 대표로 선출되지만 아라곤 왕 페르난도1세(Fernando I, 1380~1416, 재위1412~1416)가 사망하고 새로 왕위에 오르는 알폰소5세(Alphonso V, 1396~1458, 재위1416~1458)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공의회는 참석하지 않고, 당시 재위한 시기가 비슷하고 대외명분을 찾고자 했던 주군인 알폰소5세와 당시 교황 마르티노5세(Martinus PP. V, 1369~1431, 재위1417~1431)사이의 가교역할을 하여 둘 사이를 잘 연결시켜 그 보상으로 바르셀로나 교구를 맡게 되고, 이후 례이다 대학교 부총장까지 역임하고 이후 알폰소5세를 위해 부총장직을 사임하기도 한다. 1429년 교황 마르티노5세와 알폰소5세로부터 대립교황 클레멘스8세의 사임건을 맡게되는데,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직접 대립교황 클레멘스8세를 찾아가 사임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여 고향인 발렌시아 교구를 맡게되고 주교에 서임된다. 이후로도 알폰소5세를 계속 섬기면서 나폴리를 점령하여 나폴리의 군주위까지 오르는 알폰소5세를 도와 나폴리를 재건하는데 힘썼고 마르티노5세 후임교황이 되는 에우제니오4세(Eugenius PP. IV, 1383~1447, 재위1431~1447)와 알폰소5세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여 관계회복을 시켜준 대가로 추기경에 서임된다.
1455년 콘클라베
1455년 3월 24일 교황 니콜라오5세(Nicolaus PP. V, 1397~1455, 재위1447~1455)가 선종하여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콘클라베가 시작된 날짜는 1455년 4월 4일이고 5일간(4월8일까지)지속되었고, 21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6명이 불참한 15명의 추기경이 교황 선출을 위한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이래로 동방 정교회 추기경들까지 참석한 콘클라베는 오랜기간 따로 떨어져있던 다른 문화권의 추기경들간의 화합이 되지 않아(대표적으로 동방 정교회 추기경중 유력 후보로 올랐던 바실리오스 베사리온이 서방 교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수염을 기르고 나오는등 서방 교회 추기경들의 반발이 많았다) 수차례 투표를 진행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자 중립 성향의 교황 후보들을 물색하기 시작하면서 대표적 중립 성향 추기경으로 알려져있던 알폰소 데 보르하 오 보르자 추기경이 1455년 4월 8일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
I. 오스만 제국
교황 갈리스토3세는 즉위 당시 77세의 고령이였고 그만큼 건강도 좋지 않아 마음이 꽤 급했는지 1453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2세(Mehmed II, 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가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기세로 헝가리까지 침공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교황은 이러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오스만 십자군을 조직하는데 재위기간 내내 노력을 했지만 유럽 내 카톨릭 군주들은 이에 크게 호응하지 않는다. 십자군은 고사하고 당장에 헝가리쪽 침공을 막기 위한 것에는 호응을 표하여 1456년 이곳을 침략한 오스만군을 상대로 헝가리 왕 조반니 후냐디(Giovanni Hunyadi, 1406~1456, 재위1446~1453, 1453~1456)와 함께 오스만군을 물리치며 포위를 풀게 하고 폐퇴시킴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확장주의의 풀을 꺾이게 하는 시도에 성공한다.
II. 나폴리
1458년 나폴리 왕으로 즉위한 페르디난도1세는 아라곤 왕 알폰소5세(Alphonso V, 1396~1458, 재위1416~1458)의 사생아였는데 비록 사생아였지만 교황 에우제니오4세와 니콜라오5세가 적법 군주로 인정하여 별 문제가 없었지만 갈리스토3세는 페르디난도1세를 적법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1458년 7월 12일 칙서를 통해 나폴리 왕좌가 공석임을 선언하고 나폴리 국민들에게 페르디난도에게 복종하지 말고 군주로 삼지도, 충성을 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고 이를 위반할 시 파문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까지 한다. 이러한 완강함으로 모든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도 않고 심지어 직접 교황청까지 온 사절단을 병을 핑계로 알현하지도 못하게 한다.
선종
1458년 8월 6일 80세의 고령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