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가브리엘레 콘둘메르(Gabriele Condulmer)
207대 교황 에우제니오4세(Eugenius PP. IV, 1383~1447, 재위1431~1447)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06대 교황 | 207대 교황 | 208대 교황 |
출신 | 교황령, 제나차노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 제노바 공화국, 사르차나 |
명칭 | 마르티노5세 Martinus PP. V |
에우제니오4세 Eugenius PP. IV |
니콜라오5세 Nicolaus PP. V |
생몰년도 | 1369.01.25 ~ 1431.02.20 | 1383.01.11 ~ 1447.02.23 | 1397.11.15 ~ 1455.03.24 |
콘클라베기간 | 4일 (1417.11.08~1417.11.11) |
2일 (1431.03.02~1431.03.03) |
3일 (1447.03.04~1447.03.06) |
재위 | 1417.11.11 ~ 1431.02.20 | 1431.03.03 ~ 1447.02.23 | 1447.03.06 ~ 1455.03.24 |
출생
1383년 1월 11일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에서 아버지 안젤로 콘둘머(Angelo Condulmer, ?~1395)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코레르(Francesca Correr, 135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07대 교황으로 교황 그레고리오12세(Gregorius PP. XII, 1327~1417, 재위1406~1415)의 조카이자 교황 바오로2세(Paulus PP. II, 1417~1471, 재위1464~1471)의 외삼촌이 되는 인물이다. 외삼촌에 의해 불과25세의 나이로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1431년 마르티노5세 선종 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다. 바젤 공의회를 부정하여 해산시키고 대립관계에 놓여있던 상태에서 협상이 수차례 불발되면서 장기화되던 시점에 콜론나 가문탄압으로 인한 자치령 선포와 비스콘티 가문의 로마 침공으로 인해 로마에서 피신하여 피렌체, 볼로냐, 페라라등에서 머무른다. 바젤 공의회를 압박하기위해 동방 교회와의 연합 공의회를 주최하여 합의한 결과 바젤 공의회에서는 사보이 공작 아마데오8세(Amedeo VIII di Savoia, 1383~1451)를 교황 펠릭스5세(Antipope Felix V)로 선출시키는 등 대립이 더욱 격렬해진다.
성직
일찍이 성직 교육을 받고 외삼촌인 교황 그레고리오12세가 즉위하고 나서는 1407년 주교에 서임되고, 1년만인 1408년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기까지 한다. 추기경이되고 산 클레멘테 성당을 맡다가 외삼촌 그레고리오12세가 선종하고 즉위한 마르티노5세때에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일하게 되며 교황 특사를 역임하기까지 한다.
1431년 콘클라베
1431년 2월 20일 교황 마르티노5세(Martinus PP. V, 1369~1431, 재위1417~1431)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431년 3월 2일부터 3일까지 이틀간 실시된 콘클라베는 1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되었고 5명이 불참한 총13명의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이틀만에 교황으로 선출된 콘클라베로 서방 종교 분열이후 처음 실시된 콘클라베였기에 추기경들은 최대한 혼란을 피하고 빠르게 중재를 할 수 있는 교황을 선출하고자 뜻을 모았고 교황령에서 걷어들이는 수입의 절반을 추기경단에 나누어주고 중요한 사항들은 교황이 추기경과 상의하겠다고 약속을 받아 가브리엘레 콘둘메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에우제니오4세로 명명한 후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콜론나 가문 탄압
에우제니오4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 마자 전임 교황 마르티노5세가 행했던 것과는 반대로 여러 추기경 구성 가문에 탄압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결정은 교황령 수도 로마 내 가문의 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였는데, 탄압의 정도가 너무 강했는지 특히 탄압이 가혹했던 콜론나(Colonna)가문 구성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4세에 반해 교황령에서 떨어져나와 자치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때 동시에 비스콘티 가문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교황령을 침략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에우제니오4세는 1434년 6월, 수도회 복장으로 변복하고 배를 타고 탈출을 감행하여 피렌체 방향으로 대피하여 피렌체와 볼로냐등에서 거주하게 되고, 이후 비스콘티 군이 교황군에 의해 패배하고 항복을 함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된다.
II. 바젤 공의회
마침 즉위한 해인 1431년 바젤 공의회도 열리는데, 교황권이 점점 떨어지던 시절 공의회와 교황권간의 균형맞춤이 필요한 시점에서 1431년 7월 23일 교황 특사 추기경 줄리아노 체사리니(Giuliano Cesarini, 1398~1444)의 발표에 의해 개막된다. 안그래도 공의회가 못마땅하던 교황은 공의회 참석인원이 적어 아예 바젤 공의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이 주최하는 공의회를 이후 볼로냐에서 소집한다는 칙령을 발표한 뒤 바젤 공의회에 참석한 인원들이 반발하면서 공의회 해산을 거부해버린다. 대신 타협안으로 바젤 공의회 해산 칙령을 취소하고 공의회권이 교황권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선언하여 바젤 공의회를 인정해야한다고 요구하는데, 때마침 위에 언급한 비스콘티의 교황령 침공으로 인해 에우제니오4세가 피렌체와 볼로냐로 피신을 가는 사태가 발발하게 되면서 잠시 보류되었다가 1438년 잠시 머물고 있던 페라라(Ferrara)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바젤 공의회 참석 성직자들을 파문시켜버린다.
에우제니오4세는 동방 교회와의 통합을 꾀하기 위해 동로마황제 요한8세 팔라이올로고스(Johann VIII Palaiologos, 1392~1448, 재위1425~1448)에게 동,서방 교회 연합 공의회 소집을 제안하지만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대로 인해 본인이 머무르고 있던 페라라에서 협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페라라에 전염병이 돌게 되면서 연합 공의회 장소가 피렌체로 변경된다. 그렇게 동, 서방교회는 협상에 협상을 거듭해 1439년 7월 6일 칙서 '라에텐투르 코엘리'를 선포하여 명목상 동, 서방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행보에 바젤 공의회 참석인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4세를 이단으로 파문하고 대립교황 펠릭스5세(사보이 공작 아마데오8세, Antipope Felix V, 1383~1451, 사보이재위1416~1440, 대립교황재위1439~1449)를 선출시킨다.
선종
1447년 2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