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비오2세

Mintaka5 2025. 5. 1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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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

210대 교황 비오2세(Pius PP. II, 1405~1464, 재위1458~1464)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09대 교황 210대 교황 211대 교황
출신 발렌시아 왕국, 카날스 시에나 공화국, 코르시냐노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명칭 갈리스토3세
Callistus PP. III
비오2세
Pius PP. II
바오로2세
Paulus PP. II
생몰년도 1378.12.31 ~ 1458.08.06 1405.10.18 ~ 1464.08.14 1417.02.23 ~ 1471.07.26
콘클라베기간 5일
(1455.04.04~1455.04.08)
4일
(1458.08.16~1458.08.19)
3일
(1464.08.28~1464.08.30
재위 1455.04.08 ~ 1458.08.06 1458.08.19 ~ 1464.08.15 1464.08.30 ~ 1471.07.26

교황 비오2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05년 10월 18일 시에나 공화국 코르시냐노(Corsignano, 현재의 이탈리아 피엔차)에서 아버지 실비오 피콜로미니(Silvio Piccolomini, 1370~1451)와 어머니 비토리아 포르테구에리(Vittoria Forteguerri, 1385?~145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10대 교황으로, 시에나 대학교와 피렌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있다가 도메니코 카프라니카(Domenico Capranica, 1400~1458)주교 개인비서로 성직활동을 시작하게 되며 당해에 열리는 바젤 공의회(1431~1449)에 참석하여 뛰어난 외교력을 인정받게 되어 이후 교황들로부터 주교, 추기경 서품을 받다가 1458년 교황 갈리스토3세의 선종으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오스만 십자군을 요청하였지만 소극적인 군주들의 호응으로 인해 교황 직접 자필로 전쟁회유, 카톨릭 개종등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2세(Mehmed II, 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에게 보내는등 노력을 기울이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한 메흐메트2세로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로도 십자군 원정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자신의 건강을 보살피지 못하고 병이 악화되어 1464년 선종한다.

 

성직

시에나 귀족가문이였던 피콜로미니 가문은 당시 시에나에 있던 라이벌 가문 톨로메이 가문과 갈등을 일으켜 영향력이 줄다가 시에나에서 추방되는데,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먹고 살지는 않는 편이였던 에네아의 부모님은 에네아가 어릴적부터 개인 교사를 초빙해 에네아를 직접 가르치게끔 하였고, 1423년 아버지 실비오 피콜로미니는 에네아를 시에나 대학교로 보내 법학을 공부하게끔 한다. 그러나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님이 선택한 학업과정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에네아는 수업을 듣지 않고 그 시간에 친구들과 놀거나 여자와 노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실비오가 1429년 학업을 잘 마치라고 타일러 시에나 대학교에서 피렌체 대학교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뒤 고향 시에나로 돌아와서 교사가 된다. 1431년 페르모에서 사역활동을 하던 도메니코 카프라니카(Domenico Capranica, 1400~1458) 주교의 비서직을 시작으로 성직업무경력이 시작되게 되는데, 마침  1431년 열리게 되는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는 도메니코 주교를 따라 알프스를 넘어 갈 정도로 열심히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후로도 비서로 일하다가 1435년 공의회에서 만난 교황 에우제니오4세의 교황 특사인 니콜로 알베르가티(Niccolò Albergati, 1373~1443)추기경으로부터 프랑스 왕국과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던 부르고뉴 공국 두 국가를 달래기 위해 아라스로 파견되어 두 국가의 군주들(프랑스 샤를7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3세)을 만나며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끔 달래면서 '아라스 조약(The treaty of Arras, 1435)'을 체결해 내는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사생아도 두명 낳았다고 한다. 바젤 공의회는 점점 교황권과 공의회권의 분쟁으로 격화되는데, 1437년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 로마왕재위1410~1437, 신성로마재위1433~1437)가 사망하면서 협치점을 잃은 공의회는 분열되면서 교황 에우제니오4세는 장소를 페라라로 옮긴다. 이에 기존의 바젤 공의회 의원들은 분노하여 1439년 11월 대립교황 펠릭스5세(사보이 공작 아마데오8세)를 선출시킴으로서 분쟁의 정점을 찍게 된다. 에네아는 공의회당시 평신도에 불과하였지만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해 교황 에우제니오4세, 공의회, 대립교황 펠릭스5세,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3세등 사이에서 조정을 잘 하여 화해를 시키고 공의회를 마저 잘 이끌어가게끔 유도하는 공을 세워 1447년 교황 니콜라오5세(Nicolaus PP. V, 1397~1455, 재위1447~1455)로부터 주교 서임을 받고, 1456년 교황 갈리스토3세(Callistus PP. III, 1378~1458, 재위1455~1458)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된다. 

 

1458년 콘클라베

1458년 8월 6일 교황 갈리스토3세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콘클라베는 1458년 8월 16일에 열리게 되어 8월 19일까지 4일간 지속되는데, 총27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8명이 불참하고 1명(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추기경)이 콘클라베 직전 선종하면서 총 18명(이탈리아추기경8명, 스페인추기경5명, 프랑스추기경2명, 포르투갈추기경1명, 그리스추기경2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로마 분위기는 최초의 아라곤(스페인)출신 교황인 갈리스토3세의 족벌주의와 고향인 아라곤 지역의 동포들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인해 비판이 거센 상태였고 이로인해 비 이탈리아 출신 교황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던 시기였다. 거기다가 아비뇽 유수(1309~1378)동안 프랑스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었는데 1453년 백년전쟁(1337~1453)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추기경들은 더욱 프랑스출신 추기경을 경계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온건한 성향의 도메니코 카프라니카(Domenico Capranica, 1400~1458)추기경을 유력한 교황후보로 내세우지만, 콘클라베 시작 이틀전인 1458년 8월 14일 갑작스럽게 선종해버리면서 혼란에 빠진다. 콘클라베는 8월 16일 시작한 이후 후보를 올리는등 시간을 보내다가 8월 18일이 되어서야 1차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5표를 받고 1위를 차지하지만 2/3이상 표를 획득하지 못해 교황 선출이 되지 못하고 2차투표를 당일 저녁에 실시하게 되지만 그 또한 되지 못하고 다음날인 8월 19일 오전 3차 투표때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명은 '비오'라는 이름을 선택하였고 비오2세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공의회주의 부인

평신도 시절 참석했던 바젤 공의회(1431~1449)에서 공의회편에 섰던 비오2세였지만, 교황이 되고난 이후 전임 교황들이 왜 공의회를 반대했는지를 깨닫고(교황 권위 축소의 원흉), 이전에 취했던 공의회주의를 부인하고 1460년 1월 칙서 'Execrabilis(1460.01.18)'를 통해 공개적으로 공의회 소집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교황의 권위를 높여 절대주의적 치세를 누리고 싶어했던 비오2세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상반된 모습에 교황청내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II. 유대인

비오2세는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즉위 직후 시점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 대해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게 되는데 이에 막대한 자금이 들거라는 계산 하에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끌어모아야 했던 시점이였다. 그리하여 교황은 유대인에게까지 십자군 원정에 기부금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하는데 이에도 불구하고 비오2세는 당시의 교황령 내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보호하는데 앞장 선 교황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III. 오스만 십자군

비오2세는 교황으로 즉위하기 5년전인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다. 그렇게 교황은 1458년 10월 즉위한지 2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당시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2세(Mehmed II, 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에게 직접 대항하여 공의회 소집을 유럽 내 카톨릭 국가 군주들에게 제안한다. 이는 만토바 공의회라고도 불리는 공의회인데,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여 이들을 토벌하겠다는 의지로 1459년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열지만, 카톨릭 국가 군주들이 십자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면서 호의를 얻는데 실패하고 마는데, 이에 만토바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던 비오2세는 지친 마음에 가는 도중 고향 시에나에 들러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휴식도 여러곳에서 소요되는 갈등으로 인해 금방 로마로 복귀하여 중재에 나선다. 오스만 십자군 결성은 시간이 지남에도 진척이 없게 되면서 교황은 직접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2세에게 서신을 보내서 이슬람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종용하고,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희망을 피력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 정치적으로도, 대외 명분적으로도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자세를 취하지만 메흐메트2세의 무반응과 개종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난다.   

 

 

선종

1464년 8월부터 고열에 시달린 비오2세는 투병중에도 불구하고 당시 열린 십자군의 사기를 올리기위해 교황이 몸소 직접 장소로 가게 되는데 점점 더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4일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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