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220대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프로필 | 219대 교황 클레멘스7세 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1.26~1534.09.25 |
220대 교황 바오로3세 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0.13~1549.11.10 |
221대 교황 율리오3세 Iulius PP. III 1487~1555 1550.02.07~1555.03.23 |
출생
1468년 교황령 라치오 카니노(Canino)에서 아버지 피에르 루이지 일 파르네세(Pier Luigi I Farnese, 1435~1487)와 어머니 조바넬라 카에타니(Giovannella Caetani, 1440~146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중세 이탈리아의 고귀한 가문인 파르네세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 어려서부터 인문학교육과 더불어 역사, 고전, 수학, 과학등을 배워 다방면으로 배경을 만들고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재임1469~1492)의 궁정에 들어가 수많은 학자, 예술가, 정치인, 성직자들과 만나 친분을 쌓게되고 특히 미래의 교황이 되는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미래의 레오10세)와 줄리오 데 메디치(미래의 클레멘스7세)등을 만나 친분을 쌓은 결과 이후 교황청에서 업무를 보고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교황들이 거쳐감에도 불구하고 지위와 명성을 유지한다. 1534년 클레멘스7세의 선종으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3세로 즉위하지만, 재위기간동안 유럽의 패자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었는데, 즉위 7년전 로마 약탈(Sacco di Roma, 1527)로 로마 전체가 약탈, 방화, 암살등으로 얼룩졌었던지라 더욱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로3세에겐 정부와 사생아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손자는 이후 10대의 나이로 추기경에 오르는등 족벌주의에도 일축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카톨릭을 수호하고 당시 유럽에서 확산하던 프로테스탄트를 막기위해 애를 쓰지만 말년에 두 조카 오타비오 파르네세(Ottavio Farnese, 1524~1586, 재위1547~1586)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일 조바네(Alessandro Farnese il Giovane, 1520~1589)의 다툼을 보고 중병을 얻어 1549년 선종한다.
성직
로마에서 인문학자인 스승 줄리오 폼포니오 레토(Giulio Pomponio Leto, 1428~1498)로부터 문학, 역사, 고전등을 배우고 과학자인 스승 알베르토 피글리오(Alberto Piglio, ?~?)로부터 수학, 과학분야를 배운다. 이후 피렌체 공화국으로 보내져 당시 피렌체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재임1469~1492)의 궁정에 들어가 인문학자나 다름없던 로렌초 데 메디치로부터 기본적인 인문학 소양을 익히고 인문학자들의 강의에 참석하여 분야를 확장시킨다. 궁정내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친분을 쌓게 되는데, 특히 메디치 가문 사람이자 둘 모두 이후 교황이되는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미래의 교황 레오10세, 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와 줄리오 데 메디치(미래의 교황 클레멘스7세, 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등을 만나서 친분을 쌓는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1491년 알레산드로는 교황청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1493년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6세(Alexander PP. VI, 1431~1503, 재위1492~1503)에 의해 25세의 나이에 부제급 추기경 서임과 함께 로마에 있는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노 성당의 근무를 명한다. 이는 알레산드로의 여동생인 줄리아 파르네세(Giulia Farnese, 1475~1524)가 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연인이였기에 교황의 치마폭에 싸인듯한 상당한 대우를 받았기에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보와 별개로 능력이 출중하여 교황청 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면서 알렉산데르6세 이후 교황들 비오3세, 율리오2세, 레오10세, 하드리아노6세, 클레멘스7세등의 교황을 서로 반대성향인 경우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알레산드로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여 이후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재위 시기때인 1524년 추기경중 최고 품계인 주교급 추기경이 되고 추기경 단장이 되어 추기경들을 이끄는 위치에 서게 된다.
로마 약탈
1527년 5월 6일 로마가 신성로마제국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에 의해 자행된 사건으로, 두해 전인 1525년 파비아 전투(The Battle of Pavia, 1525.02.24)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Franc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제국군에 의해 거의 전멸하듯이 대패하고 프랑수아1세가 제국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버린다. 당시 유럽내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였던 프랑스가 단숨에 패배해버림에 따라 당시 49세의 젊은 교황 클레멘스7세는 즉위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프랑스를 지지하였고 1519년 카를5세가 황제에 선출되어 즉위하는 것을 반대한 인물로 이전부터 서로 원수지간이였는데, 점점 강성해져가던 신성로마제국과 카를5세의 유럽 제패 야욕을 꺾고 유럽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1526년 5월 코냑 동맹(The war of the league of Cognac, 1526~1530)을 결성해 프랑스 왕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국, 교황령의 군사를 합쳐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1세 델라 로베레(Francesco Maria I della Rovere, 1490~1538, 재위1521~1538)를 코냑 동맹군 총사령관으로 삼고 신성로마제국군 총사령관 샤를3세 드 부르봉(Charles III de Bourbon, 1490~1527, 재위1501~15)과 맞서는데, 이미 프랑스는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하고 왕까지 포로로 잡혀버리는 것에 충격을 받고 이후 전투에서는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동맹 내 국가들도 이런저런 사정을 들며 파병을 하지 않게 되면서 전체적인 전투들이 소극적으로 되어버리는데, 이에 황제 카를5세는 제국군 3만5천여명으로 하여금 교황령 수도 로마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들은 로마를 지키던 5천의 병력과 스위스 근위대를 격파하고 포병부대를 앞세워 단숨에 로마로 진격해버리는데, 이에 교황 클레멘스7세는 비밀 통로를 통해 피신을 하지만 전투 도중 제국군 사령관 샤를3세 드 부르봉이 전사해버리면서 제국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통제를 받지 않고 흥분한 제국군은 로마에 입성하여 약탈, 민간인 살육, 파괴를 자행하면서 무법천지로 만들어버린다. 스위스 근위대들은 끝까지 교황청을 지키다가 모두 전사하여 이때부터 현재 2025년에 이르기까지도 매년 5월6일이 될 때마다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임 스위스 근위대는 충성서약을 하는 전통이 생겨난다. 알레산드로는 1527년 5월 20일 황제 카를5세에게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자행된 로마 약탈에 대한 조율을 하기위해 신성로마제국 수도 빈으로 간다.
1534년 콘클라베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가 1534년 9월 25일 선종하면서 다음달인 10월 11일에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46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35명이 콘클라베에 참석하였고 당시 알레산드로 추기경은 유력한 교황 후보로 추천되어 오르는데, 중도 성향이였던 알레산드로 추기경은 유럽내 대부분 국가의 추기경들로부터 지지를 받게되어 콘클라베가 시작된지 이틀만인 1534년 10월 13일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명은 바오로로 명명하였고 바오로3세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개신교 저지
1534년 10월 13일 즉위한 후 17년전 발생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루터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유럽의 두 열강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이들을 억제해주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신성로마제국 내 교구를 맡은 성직자들도 루터교를 믿는 것이 확산되면서 바오로3세는 이들을 색출해 내어 파문시키는등 자비없는 행보를 보인다. 1534년 당시 잉글랜드 왕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가 첫째 부인 캐서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과 결혼하기위해 첫째 부인과 이혼하려고 당시 전임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뜻을 밝히지만 교황이 이혼을 윤허하지 않으면서 헨리8세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 카톨릭을 버리고 수장령을 선포하여 스스로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바오로3세는 헨리8세를 1538년 12월 파문시키고 잉글랜드를 고립시키기위해 다른 유럽내 카톨릭 국가 군주들의 연합을 구성하려 했지만 당시 정세가 복잡하고 국가간의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라 실현되지는 못한다. 루터교가 확산되면서 바오로3세는 1542년 7월 21일 칙서 'Licet ab initio'를 발표하여 종교 재판소를 설립시키기에 이른다.
II. 트리엔트 공의회
바오로3세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해 추기경단을 확대시켜 공의회 소집을 통한 카톨릭의 단합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에 교황이 직접 1537년 신성로마제국 수도 빈을 방문하여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를 만나 공의회가 열리는 장소를 의논하고 약속을 받지만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당장에 열리려던 공의회가 취소되고 두 국가간의 분쟁이 끝날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그러다 1542년 두 국가간의 분쟁이 사그라들면서 5월, 바오로3세는 1542년 10월 첫째날에 트리엔트에서 공의회를 열 것을 천명하고 성직자들을 소집한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일부 국가들의 분쟁으로 인해 1543년 7월에 다시 중단되기에 이르고 타이밍을 보다가 1544년 11월 칙서와 함께 공의회 재소집을 명하고 1545년 12월에 산 비질리오 대성당에서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547년 트리엔트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공의회 장소를 트리엔트에서 볼로냐로 옮기게 된다. 우선적으로 이 공의회는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의 마음에 들지않는 내용들로인해 바오로3세와 마찰이 있었고 1547년 교황의 강력한 우군이였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마저 승하해버려 공의회 구심력의 명분을 잃은 바오로3세는 1549년 공의회를 중단시키기에 이른다.
III. 르네상스
바오로3세 재위기간(1534~1549)동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절정을 이루고 슬슬 다음 양식이 나올법한 시기였던 만큼 교황은 예술가, 건축가, 학자들을 후원하여 이들로부터 수많은 작품과 건축물, 기념물등의 개발과 건설을 명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발전시킨다. 교황이 등용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였고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The last supper, 1495-1498)을 의뢰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점검등의 의뢰를 맡기고 당대의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역시 바오로3세에 의해 베네치아에서 교황령 로마로 초청되어 바오로3세 가족들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수많은 작품들을 그리도록 의뢰한다. 과학쪽으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지동설 발표로 유명했던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율리우스력 개정 제안을 바오로3세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전달하였고 교황은 이에 호응하여 율리우스력 개정관련 업무도 시작하게 되고 이는 40여년 뒤인 교황 그레고리오13세(Gregorius PP. XIII, 1502~1585, 재위1572~1585)에 의해 1582년 그레고리력을 제정하여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선종
1549년이 되면서 80세가 넘은 고령의 바오로3세는 건강이 악화되는데 두해 전 1547년 자신의 조카들인 오타비오 파르네세(Ottavio Farnese, 1524~1586, 재위1547~1586)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il Giovane, 1520~1589)의 파르마 공국과 피아첸차 공국 합병 문제를 두고 두 조카들이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병세가 더 위중해져 1549년 11월 10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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