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Adriaan Florisz d'Edel)
218대 교황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1523)
|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 직위 | 217대 교황 | 218대 교황 | 219대 교황 |
| 출신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신성로마제국, 위트레흐트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명칭 | 레오10세 Leo PP. X |
하드리아노6세 Hadrianus PP. VI |
클레멘스7세 Clemens PP. VII |
| 생몰년도 | 1475.12.11 ~ 1521.12.01 | 1459.03.02 ~ 1523.09.14 | 1478.05.26 ~ 1534.09.25 |
| 콘클라베기간 | 6일 (1513.03.04~1513.03.09) |
13일 (1521.12.28~1522.01.09) |
1개월 10일 (1523.10.01~1523.11.10) |
| 재위 | 1513.03.09 ~ 1521.12.01 | 1522.01.09 ~ 1523.09.14 | 1523.11.26 ~ 1534.09.25 |

출생
1459년 3월 2일 신성로마제국 위트레흐트(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아버지 플로렌스 보이엔츠(Florens Boeyensz, ?~1469)와 어머니 거트루드(Geertruid,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18대 교황으로, 카톨릭 역사상 유일한 네덜란드 출신 교황이면서 1978년 비 이탈리아인(폴란드 출신)추기경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요한 바오로2세, Ioannes Paulus PP. II, 1920~2005, 재위1978~2005)가 교황으로 선출되기까지 455년간 최초의 비 이탈리아인 교황으로 남게된다.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가 아버지 펠리페1세(Felipe I, 1478~1506, 부르고뉴재위1482~1506, 카스티야재위1506)가 6세때 급사하면서 고모인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가 어린 카를을 돌보고 있을 때 마르가레테는 어린 카를의 교율을 위해 루뱅 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아드리안을 개인 교사로 불러들여 수년간 카를을 가르키게끔 한다. 이런 인연으로 아드리안은 카를의 총애를 받고 1520년 신성로마황제 즉위식으로 스페인을 비울 때 스페인 총독으로 2년간 일하는데 일하던 도중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가 선종하여 콘클라베가 열리는데 자신은 총독직을 맡고 있었기에 떠날 수 없어서 불참한채로 콘클라베가 치루어지는데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성직
아드리안이 10세가 되었을 때인 1469년 아버지 플로렌스 보이엔츠가 사망하면서 아드리안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현 네덜란드 즈볼러(Zwolle)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Vitae Communis 또는 Brethren of the Common Life, 로마 카톨릭 공동체)에서 수도생활과 함께 교육을 받게끔 했다.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교육을 마치고 루뱅(Louvain)으로 와서 루뱅 대학교에 1476년 입학하여 철학, 신학, 교회법등을 공부하여 1491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15년간 열심히 공부한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루뱅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학장, 부총장, 총장등을 역임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1506년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1세(Maximilian I, 1459~1519, 독일왕재위1486~1519, 신성로마재위1508~1519)의 딸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Margarete von Österreich, 1480~1530)가 사망한 오빠인 카스티야 왕이자 부르고뉴 공작인 펠리페1세(Felipe I, 1478~1506, 부르고뉴재위1482~1506, 카스티야재위1506)를 대신해 플랑드르의 총독이 되었고 아버지를 잃은 카를을 보살피게 된다. 1507년 당시 플랑드르에서 어린 부르고뉴 공작인 7세의 카를(미래의 카를5세, 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개인교사 자격으로 카를을 가르치게 되면서 이 인연으로 1512년부터는 카를의 고문으로 임명되고 1515년 교황 대사로서 스페인에 파견되는데, 1516년 스페인(당시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왕 페르난도2세(Ferdinando II, 1452~1516, 카스티야레온재위1475~1504, 아라곤재위1479~1516)가 승하하면서 카를이 어머니 후아나(Juana, 1479~1555, 재위1504~1555)와 공동즉위하게 되는데 정신질환이 있던 어머니 후아나는 사실상 영향력이 없었기에 카를이 실권을 쥐고 있어 카를은 아드리안을 아라곤 종교재판소장(1516~1522)으로 임명한다.
거기다가 이듬해 1517년 당시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기까지 하였고 1519년 카를이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더욱 총애를 받는데, 1520년 카를5세가 황제 대관식으로 인해 1522년까지 2년간 스페인 왕좌를 비워야할 상황이 생기면서 아드리안 추기경에게 섭정직까지 맡긴다. 섭정직을 맡던 1520년 말에서 1521년 사이 카를5세의 통치를 반대하던 카스티야-레온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코무네로스 반란(The Revolt of the Comuneros, 1520~1521)이 일어난다. 정신질환으로 인해 사실상 유폐되어있던 카를5세의 어머니 후아나의 통치를 원했는데, 아드리안은 1521년 4월 23일 군대를 겨우 꾸려 빌라라르 전투(The Battle of Villalar, 1521.04.23)에서 겨우 반란군을 막아낸다.
1521~1522년 콘클라베
1521년 12월 1일 교황 레오10세가 선종하면서 12월 27일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총39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에 아드리안은 스페인에서 섭정직을 맡고 있었기에 자리를 비워 콘클라베에 참석할 수 없었다. 당시 콘클라베는 1521년 12월 27일부터 이듬해 1522년 1월 9일까지 2주일간 지속되었는데 당시 유럽의 강자들*(신성로마황제 카를5세,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 잉글랜드 왕 헨리8세)의 힘겨루기로 좀처럼 표가 나오지 않고 있던 상황이였는데 한겨울에 소집된 콘클라베에 단기간에 선출이 되지 않으며 길어지자 혹한에 지쳐가던 추기경들은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 추기경에게 표를 몰아주게 되면서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 된다. 물론 아드리안 추기경은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않았고 스페인에서 섭정직을 맡고있던 도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면서 로마로 가게 된다.
*유럽의 강자들
| 이름 | 생몰년도(재위) | |
| 신성로마제국 황제 | 카를5세(Charles V) | 1500~1558(재위1519~1556) |
| 프랑스 왕 | 프랑수아1세(Francois Ier) | 1494~1547(재위1515~1547) |
| 잉글랜드 왕 | 헨리8세(Henry VIII) | 1491~1547(재위1509~1547) |
교황
교황으로 선출되고 교황명은 하드리아노로 정하면서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1523)가 된다. 당시 63세의 고령이였던 하드리아노6세는 선출된 뒤 7개월 뒤인 8월에 대관식을 치르고 개혁의지를 곧바로 보이게 된다. 이미 전임 교황 레오10세 치하에 부패(면죄부 부여 제도, 재정비리등)와 악습이 심각해져있었기에 교황청 내부 문제부터 해결하고자 손을 쓰게 되는데 부패한 추기경들의 방해를 받게 되면서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술가들은 교황이 비 이탈리아 출신으로 르네상스에 무지하여 그저 엄격하고 예술에 무감각한 인물로 보면서 분개한 교황 하드리아노6세는 이들의 급여를 줄여 교황청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즉위 당시 점점 유럽쪽으로 야욕을 드러내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유럽 카톨릭 국가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하드리아노6세는 교황청 내부부터 결속되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1517년 신성로마제국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벌인 종교 개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1522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리게 되면서 프란체스코 키에라가티(Francesco Chieregati, 1479~1539)주교를 대리인으로 보내 이런 혼란의 책임은 교황청에 있고 개혁은 교황청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서 카톨릭 개혁의 첫 시작점으로 보고 있지만, 루터의 교리 수정에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이단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선종
1523년 9월 14일 즉위한지 1년8개월만에 선종하면서 하드리아노6세가 시도하고자 했던 개혁은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