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o di Giuliano de' Medici)
219대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프로필 | 218대 교황 하드리아노6세 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01.09~1523.09.14 |
219대 교황 클레멘스7세 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1.26~1534.09.25 |
220대 교황 바오로3세 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0.13~1549.11.10 |
출생
1478년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Firenze)에서 아버지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53~1478)와 피오레타 고리니(Fioretta Gorini, 1453~147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아버지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파치가의 음모로 암살당하고 어머니까지 출산직후 사망하면서 사생아였던 줄리오는 백부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의해 양육되며 교육을 받고 사촌형인 교황 레오10세에 의해 고속 승품되어 추기경에 이르렀고 1521년 사촌형 레오10세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러나 11년의 재위기간(1523~1534)동안 바람들날이 없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와의 대립으로 코냑 동맹까지 결성해 대립하지만 1527년 5월 6일 로마 약탈이 자행되며 로마가 쑥대밭이 되고 자신은 항복 후 포로가 되면서 교황권이 바닥까지 추락하고 만다. 이후로도 카를5세의 눈치를 보면서 세력을 확장하지만 1534년 식사중 독버섯을 먹고 선종해버린다.
사생아
줄리오는 태어나기 한달 전인 1478년 4월 26일 아버지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파치가의 음모에 휘말려 백부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재임1469~1492)와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다가 공격을 당한다. 백부 로렌초는 가까스로 살아나지만 아버지 줄리아노는 파치 가문의 프란체스코 데 파치(Francesco de' Pazzi, 1444~1478)에 의해 살해당한다. 줄리오는 아버지가 암살당한지 한달 뒤인 1478년 5월 26일에 태어나지만 얼마있지않아 어머니 피오레타 고리니 마저 사망함으로서 졸지에 사생아가 되버렸는데 백부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줄리오를 데려다가 친아들처럼 키우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성직
그렇게 백부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의해 양육되면서 성장하지만, 1494년 사촌형이자 백부 로렌초 데 메디치를 이어 피렌체의 군주가 된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2~1503, 재임1492~1494)가 1494년 프랑스 왕 샤를8세(Charles VIII, 1470~1498, 재위1483~1498)가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을 해오면서 피에로는 대응도 하지 않은채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면서 샤를8세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면서 피렌체 공화국 전체가 불이익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메디치가문 일가는 피렌체를 떠나 베네치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렇게 1494년 줄리오 역시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피난오게 되고, 사촌형 피에로의 친동생이자 미래에 교황 레오10세가되는 추기경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를 만나 같이 지내게 된다. 추기경이였던 사촌형 조반니의 도움으로 교황청에서 일을 하게 되다가 사촌형 조반니가 1513년 교황에 선출되고 레오10세로 즉위하면서 줄리오 역시 순식간에 서품되는데, 1513년 3월 사촌형 레오10세가 즉위한지 6개월이 지난 1513년 9월, 줄리오를 피렌체 대주교 겸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고 이 이후 잉글랜드에 파견되는데, 이는 교황 레오10세가 당시 유럽의 패권을 쥐고있던 스페인과 프랑스가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교황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 두 국가간의 힘겨루기의 변화에 따른 이득을 취하기위해 보내게 된 것이다. 1519년엔 조카이자 피렌체를 통치하던 군주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 1492~1519, 재위1516~1519)가 사망하면서 줄리오가 피렌체까지 통치하게 되는데, 4년간(1519~1523) 추기경과 더불어 피렌체까지 통치를 맡다가 1523년부터는 실비오 파세리니(Silvio Passerini, 1469~1529)추기경을 교황 대사로 임명해 피렌체를 통치하게끔 지시한다.
콘클라베
I. 1521~1522년 콘클라베
사촌형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가 1521년 12월 1일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21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522년 1월 9일까지 2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콘클라베가 진행되는데, 총39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구성되었고 유력한 교황 후보로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과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미래의 교황 바오로3세)등이 언급되었는데 콘클라베 당시 유럽의 열강 군주들(신성로마황제 카를5세,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 잉글랜드 왕 헨리8세등)의 힘겨루기와 각자 국가의 추기경들의 후보 추천을 위해 자금이 왔다갔다 정신이 없었다. 결과가 좀처럼 나지 않고 가장 추운 겨울시기동안에 열린탓에 혹한에 고령의 추기경들이 지쳐가자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의 총애를 받고 스페인 총독으로 있던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 추기경(미래의 하드리아노6세)에게 표를 몰아주게 되면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아드리안 추기경은 콘클라베에 참석하지않았고 스페인에 머무른 상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보고 받고 로마로 간다.
II. 1523년 콘클라베
1523년 9월 14일, 교황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1523)가 즉위한지 1년 8개월만에 선종하면서 다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23년 10월 1일 시작된 콘클라베는 11월 19일까지 50일간 진행되었고, 41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6명이 불참한 35명이 참석하였고 전임 교황 클레멘스7세가 임명한 추기경들이 절반에 가까웠고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이 다음을 이었는데, 프랑스 추기경단들이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미래의 교황 바오로3세)을 지지하였지만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는 비코카 전투(The battle of Bicocca, 1522.04.27)에서 승리한 후 권위를 얻어 제국 정책에 호의를 보이고 옹호적이던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을 지지하게 되면서 표가 몰려 2/3이상의 득표를 얻어내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명은 클레멘스(Clemens)로 명명하고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프로테스탄트
교황에 즉위한 이후 클레멘스7세는 즉위당시 6년전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불을 지핀 종교개혁으로 루터교가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1521년 루터가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에게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의 확산은 멈출줄 모르고 가속화되고있었다. 그러나 클레멘스7세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에 그리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과소평가 하였고 심지어 잉글랜드 왕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가 첫째 아내 캐서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이 딸 메리(미래의 메리1세)를 낳고 남자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캐서린이 폐경이 와버리면서 점점 그녀를 멀리하고 캐서린의 하녀중 한명이자 가장 아름다운(헨리8세 주관) 여인 중 한명이였던 앤 불린(Anne Bolyen, 1501~1536)과 사랑에 빠지면서 헨리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하기위해 1527년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캐서린과의 이혼을 요구했는데 교황은 이를 거부한다. 교회 교리법상에 따르면 결혼 취소가 불가하긴 했지만 사실 캐서린 다라곤은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의 작은이모였고, 카를5세의 지지로 교황에 올랐던 클레멘스7세로서는 부담이 가지않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혼 금지에도 불구하고 헨리8세는 캐서린과 이혼 후 1533년이 되자마자 앤 불린과 결혼하기에 이르면서 헨리8세는 파문당한다. 그로부터 1년 후 1534년 헨리8세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의회에서 공식 통과되면서 헨리8세 스스로가 잉글랜드 성공회 수장으로 오르게 된다.
II. 코냑 동맹
1523년 즉위 후 클레멘스7세는 발칸 반도를 침략해오던 오스만 제국 칼리파 슐레이만 대제(Suleiman I, 1494~1566, 재위1520~1566)에 대항하기위한 연합군을 구성해 카톨릭 군주들이 동맹을 맺는 것을 희망했다. 특히 서로 으르렁거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François Ier, 1494~1547, 재위1515~1547)간의 화해를 주선하고자 했지만 클레멘스7세는 1524년 밀라노를 정복한 프랑스 편을 들어버리면서 분개한 황제 카를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동맹을 맺지만 1525년 프랑스 군이 파비아 전투(The battle of Pavia)에서 카를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당하고 프랑수아1세까지 포로로 잡혀버림으로서 의지할 곳을 잃은 클레멘스7세는 숨죽이고 있는다. 그러다가 1526년 카를5세에 대항해 코냑 동맹을 결성해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등과 합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맞서지만 동맹국들이 소극적인 행태를 보이면서 이대로는 전투도 하기전에 궤멸될 것이라 판단하여 교황 클레멘스7세는 황제 카를5세와 별도로 8개월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III. 로마 약탈
교황 클레멘스7세와 황제 카를5세간 별도로 체결된 8개월의 휴전협정이 끝나고 1527년, 카를5세는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샤를3세 드 부르봉(Charles III de Bourbon, 1490~1527)을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밀라노쪽으로 공격을 게시하지만 생각보다 견고했던 밀라노였고, 제국군 군인들에게 임금체불이 지속되면서 점점 분노가 쌓이던 제국군 군인들은 지휘관들을 위협하기 시작해 이에 지휘관들과 사령관 샤를3세 드 부르봉은 1527년 3월 진격을 거듭해 볼로냐, 토스카나까지 이르면서 중간지역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황폐화 시키면서 측면 공격을 시전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이들의 행위에 격노한 카를5세가 로마를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527년 5월, 순식간에 로마에 다다른 제국군은 이미 이전부터 임금체불로 인한 분노가 쌓일데로쌓인 상태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벌여 1527년 5월 6일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전투 도중 성벽을 오르던 제국군 사령관 샤를3세 드 부르봉이 전사하고 만다. 안그래도 분노가 쌓인 제국군 군인들은 심지어 루터교 신자들이였기에 더욱 거칠어지는데, 지휘관까지 전사해버리면서 더욱 흥분하고 지휘체계가 붕괴되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벽이 무너지고 제국군 군인들은 폭도로 돌변해 무차별적으로 로마 시가지를 파괴하고 약탈, 살육, 방화, 강간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클레멘스7세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지만 교황궁을 지키던 병사1천여명이 전사 또는 붙잡혀 처형당하고 수도원, 성당, 저택등이 파괴, 약탈당했으며 수녀를 포함한 여성들은 강간당한 후 살해되는 만행이 자행되어버린다. 현재 2025년 기점에도 매년 5월 6일마다 바티칸에 주둔한 갓 임관한 스위스 근위대 병사들은 충성서약을 함으로서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한다. 클레멘스7세는 1527년 6월 6일 산탄젤로 성에서 항복을 선언한 뒤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 대가로 40만 두캇의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의 신분이 된다. 카를5세는 자신의 의도와 다른 로마 약탈이 자행되자 매우 당황하여 공격 중지를 지시하지만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이후였다.
IV. 로마 약탈 이후
클레멘스7세는 포로가 된 이후 줄곧 산탄젤로 성 안에 감금당한채 지내고있다가 7개월 뒤인 1527년 12월 6일 풀려난다. 카를5세는 앞선 로마 약탈 사건에 대한 배상을 하기위해 교황청에 사신을 보내고 클레멘스7세는 카를5세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지는 못하였고 1529년 바르셀로나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교황령은 복위되고, 조약 내용에 의거해 카를5세를 공식 황제로 즉위시키는 대관식을 열음으로서 화해를 표시한다. 카를5세는 1530년 8월 피렌체를 점령한 후 클레멘스7세는 자신의 재종손자(사촌형 피에로 데 메디치의 손자)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 Medici, 1510~1537)를 새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하고 이후 카를5세의 눈치를 계속 보는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프랑스와의 관계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 자신의 재종손녀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를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의 장남이자 도팽(왕세자)이였던 앙리 드 부르봉(미래의 앙리2세, 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과의 결혼을 성사시켜 동맹이 아닌 혈맹을 맺게 된다.
선종
재종손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결혼식을 보러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온 이후 중병에 걸렸는데, 1534년 9월 25일 식사 중 독버섯을 먹고 선종하기에 이른다. 현재까지 암살을 당했을 거라는 가능성만 농후한채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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