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잔 피에트로 카라파(Gian Pietro Carafa)
223대 교황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프로필 | 222대 교황 마르첼로2세 Marcellus PP. II 1501~1555 재위1555.04.09~1555.05.01 |
223대 교황 바오로4세 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05.23~1559.08.18 |
224대 교황 비오4세 Pius PP. V 1499~1565 재위1559.12.25~1565.12.09 |
출생
1476년 나폴리 왕국 나폴리에서 아버지 조반니 안토니오 데이 콘티 카라파 델라스타 데라(Giovanni Antonio dei conti Carafa della Stadera, ?~1516)와 어머니 비토리아 파란치 카라파(Vittoria Franchi-Carafa,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23대 교황으로, 엄격함과 금욕주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사실상 전제주의 성향으로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교리를 정치화시켜 개혁파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정통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과도한 폭력까지 동원되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독일 내 종교로 인정된 루터파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선종할때까지 독단적인 정치를 행하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고 듣지 않을 시 가혹하고 엄격하게 다스린 교황으로 남아있다.
성직
나폴리 왕국 내 부유한 가문인 카라파 가문에서 아홉 자녀중 셋째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추기경이자 친삼촌인 올리비에로 카라파(Oliviero Carafa, 1430~1511)가 있는 로마로 가서 고대언어(그리스어, 히브리어)등을 배우면서 점점 크면서 능력을 보이게 되면서 삼촌 올리비에로 카라파는 당시 교황인 알렉산데르6세(Alexander PP. VI, 1431~1503, 재위1492~1503)에게 조카를 소개하여 교황 측근에서 봉사하며 성직생활이 시작되고, 이후 1505년 교황 율리오2세(Iulius PP. II, 1443~1513, 재위1503~1513)로부터 주교에 서임되고 삼촌 카라파 추기경이 1511년 선종하면서 삼촌이 맡고 있던 키에티(Chieti)교구를 물려받게 되고 1513년까지 2년간 이곳에서 사역한다. 1512년부터 열렸던 제5차 라테란 공의회(The Fifth Council of the Lateran, 1512~1517)에 참석하기위해 1513년 키에티에서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청 외교 사절단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5년간의 라테란 공의회는 참석자 수도 적었고 딱히 효과도 거두지 못한 채 1517년에 끝난다. 1522년 비 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에 오른 하드리아노6세(Hadrianus PP. VI, 1459~1523, 재위1522~1523)의 1년 8개월의 짧은 재위기간동안 교황이 전임 교황 레오10세(Leo PP. X, 1475~1521, 재위1513~1521)의 치세동안 부패(면죄부, 재정)등을 다잡기위해 개혁을 박찰 때 잔 역시 개혁에 참여하여 일하지만 하드리아노6세가 즉위 1년8개월만에 선종하면서 무위로 돌아간다.
이후 즉위한 레오10세의 사촌동생인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가 즉위하고 자신의 성직위를 포기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테아티노회(Cajetanus, 1524)를 교황으로 부터 조직하는 것을 허락받고 들어간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가 로마약탈을 자행하자 잔은 약탈을 피해 베네치아로 피난가서 7년간 머무른다. 1534년이 되어서 교황 클레멘스7세가 선종하고 즉위한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가 즉위하면서 1534년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교황의 개혁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일하다가 1536년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됨과 동시에 나폴리 대교구장에 임명된다. 1541년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의 주도로 개신교도들과 카톨릭간의 분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겐스부르크 화의를 열게 되면서 카라파 추기경은 지롤라모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1480~1542)와 같이 교황청 대표로 파견되어 종교재판 조정 권한을 부여하여 일을 맡기고 카라파 추기경은 1542년 로마로 돌아와 바오로3세로부터 종교재판소 설립 허가를 얻어내고 초대 종교재판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후 3차례에 달하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참석하기도 했다.
1555년 콘클라베
I. 1555년 4월
1555년 3월 23일 교황 율리오3세(I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가 선종하고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57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1555년 4월 5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지속되었고 57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되었고 20명이 불참한 상태로 37명이 투표에 참석하였다. 에스테 가문 출신 추기경, 마르첼로 체르비니 추기경(미래의 교황 마르첼로2세), 잔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이 유력 후보로서 진행되었던 콘클라베는 마르첼로 체르비니 추기경의 만장일치된 결과로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명은 본인의 세례명과 같은 마르첼로를 사용하고 숫자만 추가하여 마르첼로2세로 즉위하게 된다.
II. 1555년 5월
그러나 교황 마르첼로2세(Marcellus PP. II, 1501~1555, 재위1555)가 즉위한지 1개월도 되지않은채 선종해버리면서 다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55년 5월 15일부터 23일까지 9일간 지속되었고 56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최종적으로 44명의 추기경이 투표권을 행사하였고, 여러 파벌들간의 격렬한 경쟁 끝에 여러차례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에 실패하면서 당시 수석 추기경이였던 귀도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디산타피오라(Guido Ascanio Sforza di Santa Fiora, 1518~1564)추기경이 78세의 잔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을 추천하면서 다른 파벌들까지 설득시켜 표가 몰리지만 한두차례 선출에 실패하고 5월 23일에 만장일치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교황명은 바오로4세로 명명되어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종교재판소
이미 즉위당시 78세의 고령인데다 완고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교황이 되고 첫번째로 행한 일이 종교재판소를 카톨릭 교회의 통치 기관으로 승격시켜 교리를 정치적 수단으로 쓰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이면서 교황 스스로 성직자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을 받게끔 하고 그외의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조사대상이 되면서 재판을 받고 과하다면 처형까지 해버렸다. 그외에도 프랑스에도 종교재판소를 둬서 이단을 축출하고자 했지만 파리 의회의 반대로 인해 무산된다. 종교재판소는 출판 금지 목록을 작성하고 유형별로 출판에 문제가 되면(예를들어 교황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서적을 출판한다거나)과감하게 출판을 무효시키고 출판자까지 잡아들여 재판을 받게 하는등 이후 후임 교황들의 행보보다 훨씬 더 엄격한 금칙법을 행하게 된다.
II. 유대인
1555년 7월 14일 바오로4세는 4차 라테란 공의회 67~70항의 규정을 계승한 칙서 'Cum nimis absurbum'을 통해 이전부터 관례처럼 행해오던 관례를 깨고 로마 내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철회시키고 유대인 게토를 설립하게끔 하여 유대인들을 이곳에 고립시켜 살게끔 하고 로마뿐만아니라 다른 교황령 내 도시에도 게토를 설립시켜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모자를 쓰고 다니라고 강요한다.
III.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
바오로4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재위기간동안 유럽을 제패했던 카를5세는 1555년 9월 25일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독일왕인 동생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1세, Ferdinand I, 1503~1564, 독일왕재위1531~1558, 신성로마재위1556~1564)와 슈말칼덴 동맹 선제후들 사이에서 루터교가 공식 승인되는 종교협약이 열려 자신의 명의로 공표되지만 카를5세는 이전에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황위를 물려주게끔 되어있었는데 1550년대에 들어 아들인 펠리페(미래의 펠리페2세)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실상 형 카를5세 대신에 제국 내정을 돌보고 제후들과도 관계가 무난했던 페르디난트가 형에게 등을 돌리면서 카를5세는 권력을 상실하여 사실상 명목상 황제가 되버림으로 인해 이빨빠진 호랑이가 된다. 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교황 바오로4세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1556년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스페인 왕좌를 아들 펠리페(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에게 물려주는데 관례상 교황과 먼저 상의를 해야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것에 바오로4세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결국 효과는 없었다.
IV. 잉글랜드
교황령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까지 덩달아 관계과 악화됨에 따라 동시에 잉글랜드까지도 관계가 악화되는데, 당시 잉글랜드 여왕 메리(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의 남편인 스페인 왕 펠리페2세였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잉글랜드는 1534년 당시 잉글랜드 왕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가 앤 불린(Anne Bolyin, 1501~1536)과의 결혼을 위해 캐서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과의 이혼이 교황(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으로부터 거부되자 수장령을 반포해 헨리8세가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카톨릭을 버리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되어버림에 따라 이미 관계가 단절되있던 상태였는데, 이후 잉글랜드 군주가 임명한 사제와 카톨릭 사제간의 분열을 해결시키기 위해 1555년 6월 20일 칙서 'Praeclara Charissimi'를 발표해 주교가 사제를 서품하게끔 하고 교황이 주교를 임명하게끔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그러나 1558년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1세가 승하하면서 다음 군주로 오른 성공회 교도인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 1533~1603, 재위1558~1603)이 새로 즉위하면서 교황령과 잉글랜드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른다.
선종
1559년 83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