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Giovanni Maria Ciocchi del Monte)
221대 교황 율리오3세(I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20대 교황 | 221대 교황 | 222대 교황 |
출신 | 교황령 라치오, 카니노 | 교황령, 로마 | 교황령, 몬테파노 |
명칭 | 바오로3세 Paulus PP. III |
율리오3세 Iulius PP. III |
마르첼로2세 Marcellus PP. II |
생몰년도 | 1468.02.29 ~ 1549.11.10 | 1487.09.10 ~ 1555.03.23 | 1501.05.06 ~ 1555.05.01 |
콘클라베기간 | 3일 (1534.10.11~1534.10.13) |
71일 (1549.11.29~1550.02.07) |
5일 (1555.04.05~1555.04.09) |
재위 | 1534.10.13 ~ 1549.11.10 | 1550.02.07 ~ 1555.03.23 | 1555.04.09 ~ 1555.05.01 |
출생
1487년 피렌체 공화국 몬테산사비노(Monte San Savino)에서 아버지 빈첸초 치오키 델 몬테(Vincenzo Ciocchi del Monte, 1468~1504)와 어머니 크리스토포라 사라치니(Cristofora Saracin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21대 교황으로, 어릴적부터 삼촌 안토니오 마리아 초키 델 몬테 추기경의 영향을 받아 신학, 법학등을 전공하여 교황청에 들어가서 업무를보는데,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의 후계자로 점찍어져 바오로3세 선종 후 소집된 콘클라베(1549.11.29~1550.02.07)에서 중도주의 성향인 추기경으로서 프랑스파와 신성로마제국파의 지지로 인해 만장일치로 선출되는데, 즉위 후 5년의 치세동안 별다른 업적은 없고 교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지은 사저이자 궁전인 빌라 줄리아(Villa Giulia)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교황으로서의 업무는 보지도 않고 1555년 선종하기까지 복잡한 유럽의상황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현재까지 율리오3세 이후 교황 중 율리오라는 이름을 쓴 교황은 단 한명도 없다.
성직
어릴적부터 사제이자 삼촌인 안토니오 마리아 초키 델 몬테(Antonio Maria Chocchi del Monte, 1461~1533)에 의해 라테라노 근처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페루자, 시에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공부한다. 대학교 졸업 후 성직자가 되어 도미니코회에 소속되어 암브로지오 카타리노 폴리티(Catarino Politi, 1484~1553)의 아래에서 신학공부를 이어나가게 된다. 1504년 교황 율리오2세(Iulius PP. II, 1443~1513, 재위1503~1513)치하에서 교황청 업무를 보다가 1511년 삼촌 안토니오가 추기경에 서임되고 1513년 대주교에 승품되면서 삼촌 안토니오가 맡고있던 시폰토 대교구를 맡는데, 당해 제5차 라테란 공의회(The fifth council of the Lateran, 1512~1517)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에 의해 자행된 로마 약탈(사코 디 로마, Sacco di Roma, 1527)이 일어났을 때 당시 신성로마제국군에 인질로 잡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가 폼페오 콜론나(Pompeo Colonna, 1479~1532)추기경이 비밀리에 조반니 추기경을 풀어줘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이후 1536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으로 승품되고 1545년 열릴 트리엔트 공의회 준비를 담당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549년 콘클라베
1549년 11월 10일 교황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49년 11월 29일부터 이듬해 1550년 2월 7일까지 장장 70일에 달하는 기간동안 열린 콘클라베는 당시 추기경 선거인단 54명중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 51명으로 20세기 이전 콘클라베중 가장 많은 추기경들이 참석한 콘클라베로 남아져있다. 긴 콘클라베 동안 2명의 추기경이 선종하고 여러 추기경들이 병에 걸려 불참하게 되는등 51명에서 44명으로 줄었다. 콘클라베 당시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는 23명의 프랑스 추기경파와 22명의 신성로마제국파 추기경과 중립파 6명으로 구성됨에 따라 어느쪽에서도 파가 쏠리면 2/3이상 표를 얻는 선출자가 나오지 않고 콘클라베가 장기화될것이라 판단하여 파벌들의 계산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콘클라베는 비공개투표가 아닌 것으로 혼란이 자자했는데 콘클라베가 열린지 일주일이 지난 1549년 12월 3일 비공개투표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전교황들이 발표한 칙서를 통해 규칙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한 뒤 투표를 재개하게 된다. 이 때 규칙은 3인 이상의 추기경들끼리 비밀 회의 금지, 함께 식사하는 것 금지, 지정된 콘클라베 영역 확장 금지등으로 일축하게 된다.
볼로냐 협약에 따르면 프랑스 고위 성직자가 로마에서 선종하면 교황이 프랑스쪽 추기경을 직접 임명할 수 있었기에 임명권이 있던 프랑스 왕 앙리2세는 되도록이면 프랑스 추기경들에게 프랑스를 빠져나가지 말도록 권고하고, 교황청의 소식을 바로바로 받아 대비하게끔 지시한다. 콘클라베가 1550년을 넘기고 2월까지 60차에 달하는 투표로 인해 장기화 되면서지친 추기경들은 중립 후보를 지지하게되면서 결론을 내고자 했는데 그 중립 추기경중 한명이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 추기경이였다. 조반니 추기경은 프랑스파와 신성로마제국파 모두의 반대를 받았는데 더욱 중립을 유지하고 프랑스와 제국간의 문제발단 중심지였던 파르마 공국의 공작 카밀로 오르시니(Camillo Orsini, 1492~1559)에게 파르마를 오타비오 파르네세(Ottavio Farnese, 1524~1586, 재위1547~1586)에게 돌려주게끔 하고 오타비오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명은 율리오로 명명하고 율리오3세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희년
1550년 2월 24일, 즉위한지 2주일이 조금 지났던 날에 율리오3세는 희년을 선포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의 문을 직접열음으로서 순례자들의 유입과 함께 25년에 한번 오는 큰 행사를1년간 지속하고 1551년 1월 6일에 베드로 대성당의 문을 닫음으로서 종료된다.
II. 유럽국가들간의 외교
콘클라베때 중도 성향으로서 프랑스파와 신성로마제국파의 파르마 공국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의 지지를 약속하여 교황에 오른 율리오3세는 동시에 파르네세 추기경들에게도 지지와 함께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를 공식 승인을 요구했고, 이로서 자신을 지지해줬던 파르네세 가문 추기경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에게 파르마 공국을 할당과 함께 지위를 공식 인정하고, 오타비오의 동생인 오라치오 파르네세(Orazio Farnese, 1532~1553, 재위1547~1553)로 하여금 카스트로 공국 공작으로 공식 승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1547년 교황 바오로3세의 사생아이자 파르마 공작이였던 피에르 루이지파르네세(Pier Luigi Farnese, 1503~1547, 카스트로재위1537~1545, 파르마재위1545~1547)가 밀라노 총독이였던 페란테 곤자가(Ferrante I Gonzaga, 1507~1557, 재위1537~1557)에 의해 암살당하고,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사위였던 오타비오 파르네세에게 장인 카를5세가 자신의 공국을 빼앗으려 한다고 공포감을 심게 하여 오타비오가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이러한 복잡한 협정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잘못된 정보를 받은 교황 율리오3세는 오타비오에게 다시 파르마 공국을 카메리노 공국과 맞교환하자고 제안하지만 오타비오가 이를거부하면서 율리오3세는 오타비오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공식 직위를 박탈하였고 오타비오는 동생인 카스트로 공작 오라치오와 합세해 앙리2세의 군대와 합해 교황령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파르네세 가문이 전세에 불리해지게 되면서 전투에서 패배하고 프랑스역시 후퇴하여 알프스쪽까지 밀려나고 전투에 소극적으로 바뀜과 동시에 1552년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공식 마무리된다.
III. 빌라 줄리아에서 개인생활
율리오3세는 짧은5년의 재위기간 중 1551~1552정도까지는 파르마전쟁과 트리엔트 공의회등으로 나름 업무를 관장하긴 하지만 이후 3년정도는 자신의 사저이자 궁전인 빌라 줄리아(Villa Giulia)에서 호화스러운 파티와 행사등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보낸다. 교황의 사저 빌라 라줄리아에는 각종 예술품, 조각상등으로 호화스럽게 전시되어있었고 하루하루 안락한 시간을 보내면서 소심하게 업무를 보기도 하지만 당시 휘몰아치던 유럽의 정세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1553년 잉글랜드 새 군주가 된 여왕 메리1세(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가 성공회에서 카톨릭으로 회귀하는정책을 펼치면서 잉글랜드 카톨릭 회복을 돋구기 위해 추기경 레지널드 폴(Reginald Pole, 1500~1558)을 교황 특사로 파견한다.
선종
1555년 3월 23일 이전부터 앓아오던 통풍으로 인해 67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교황으로서 업무는 뒷전으로 두고 빌라 줄리아에서 개인적인 시간만 쏟아붓고 정세에는 관심없던 교황은 평가가 매우 좋지않아서 율리오3세이후 현재 2025년까지 율리오라는 이름을 쓴 교황은 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