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
225대 교황 비오5세(Pius PP. V, 1504~1572, 재위1566~1572)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24대 교황 | 225대 교황 | 226대 교황 |
출신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밀라노 공국, 보스코 | 교황령, 볼로냐 |
명칭 | 비오4세 Pius PP. IV |
비오5세 Pius PP. V |
그레고리오13세 Gregorius PP. XIII |
생몰년도 | 1499.03.31 ~ 1565.12.09 | 1504.01.17 ~ 1572.05.01 | 1502.01.07 ~ 1585.04.10 |
콘클라베기간 | 3개월 20일 (1559.09.05~1559.12.25) |
19일 (1565.12.20~1566.01.07) |
2일 (1572.05.12~1572.05.13) |
재위 | 1559.12.25 ~ 1565.12.09 | 1566.01.07 ~ 1572.05.01 | 1572.05.13 ~ 1585.04.10 |
출생
1504년 1월 17일, 밀라노 공국 보스코(Bosco)에서 아버지 파올로 기슬리에리(Paolo Ghislieri)와 어머니 도미니나 아우게리(Dominina Augeri)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25대 교황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이웃의 재정 지원으로 고향에서 교육을 받고 1518년 14세가 되었을 무렵 보게라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학 기초 교육을 받은 뒤 볼로냐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1528년 추기경 인노첸조 치보(Innocenzo Cybo, 1491~1550)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어 1544년까지 파비아 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철학을 가르친다. 이후 여러 교황령 공직들을 거쳐 1556년 교황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로부터 주교로 서임됨을 지명받고 2주 뒤 추기경 조반니 미켈레 사라체니(Giovanni Michele Saraceni, 1498~1568)로부터 주교 서임을 받는다. 그리고 불과 이듬해 1557년 교황 바오로4세로부터 추기경 서임을 받게 된다. 1565년 교황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가 선종하면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5세로 명명한 후 즉위하게 된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비오5세였지만 금욕주의 성향과 더불어 강직한 성격을 가지다 못해 완고하기 까지 하여 족벌주의 문제에 있어서 전임 교황 비오4세가 자신의 친족을 추기경으로 서임하고 돈을 준 사실을 교황 면전에 이야기할 정도로 마찰을 일으킬 정도였다. 교황 스스로 부패와 거리를 두면서 교황령 재정을 교회 공공의 목적에 쓰이게 하기위해 재정으로 어려운 수도원이나 가난한 빈민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이들을 먹고살게 할 수 있게끔 구제하기위해 쓰여졌기에 신자들 뿐만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황이였다. 어린시절 가난하게 자라면서 터득한 검소함을 선종할 때까지 버리지 않고 교황으로서의 기본 자세 중시와 더불어 자신에게 들어가는 의례 비용을 간소화하였다고 한다.
성직
매우 가난한 집안환경 탓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할정도였지만 이웃의 재정지원으로 고향에서 교육을 받고 1518년 14세가 되었을 때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사가 된다. 이곳에서 신학 기초 교육과 수련을 거친 뒤 볼로냐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마친 이후 1528년 추기경 인노첸조 치보(Innocenzo Cybo, 1491~1550)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다. 1528년부터 1544년까지 파비아 대학 교수로 파견되어 신학과 철학을 강의하고 도미니코회 수도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어 특유의 엄격함과 고행을 중요시하는 강직한 성격의 안토니오는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치게 되면서 1550년 반강제로 로마로 오게 된다. 로마로 와서는 종교재판소 위원이 되고 평소 안토니오를 총애해오던 잔 피에트로 카라파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로 즉위하면서 1556년 주교 서품과 1557년 추기경 서품까지 2년사이에 순식간에 3품계를 건너뛴 승급을 한다. 거기다 1558년 종교재판소 이단 심문관을 총괄하는 대심문관에까지 임명되어 총애를 받지만 1559년 바오로4세가 선종하고 즉위한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는 족벌주의 성향을 띄며 자신의 13살된 친족을 추기경에 서임시키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행태를 보지못하고 교황 비오4세 면전에다가 이야기를 하면서 교황과의 마찰이 생기고 차후 교황의 정책에도 반기를 들게 되면서 대심문관 지위를 박탈당하고 1560년 몬도비의 주교로 임명되며 가서 조용히 지낸다.
1565년 콘클라베
1565년 12월 9일 교황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가 선종함에 따라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65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1566년 1월 7일까지 3주에 가까운 시간동안 진행된 콘클라베는 당시 프랑스의 경우엔 위그노 전쟁(1562~1598)이 막 시작할 초기 시기라 프랑스 왕 샤를9세()의 섭정이자 샤를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가 정신없이 종교문제를 처리하고 있어서 콘클라베에 영향을 미칠 정신이 없었고, 신성로마제국 역시 1564년 황제 페르디난트1세(Fedrinand I, 1503~1564, 독일왕재위1531~1564, 신성로마재위1556~1564)가 승하하고 즉위한 막시밀리안2세(Maximilian II, 1527~1576, 로마왕재위1562~1576, 신성로마재위1564~1576)는 교황령의 상황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이후 후임교황들의 콘클라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역시 스페인 내정에 집중하던 시기라 딱히 콘클라베에 관심이 없었기에 1565년 콘클라베는 유럽 열강들의 간섭이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에스테 가문의 페라라 공작 알폰소2세(Alphonso II, 1533~1597, 재위1559~1597)가 에스테 가문 출신 2명의 추기경을 통해 압력을 넣기 시작하는데, 곤자가 가문과 사보이 가문출신 추기경들이 에스테 가문 출신 추기경을 지지하게 되면서 콘클라베 내 반 에스테가 추기경들은 스페인 교황 특사로 가있던 우고 본콤파니(Ugo Boncompagni, 미래의 그레고리오13세, 1502~1585, 재위1572~1585)추기경을 부르게 된다. 총70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1565년 콘클라베는 52명이 참석하고 18명이 불참한 상태에서 1566년 1월 4일 결정적으로 스페인 왕 펠리페2세의 외교사절단이 도착하면서 이들이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추기경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리고 이것이 결정적인 한방이 되어 기슬리에리 추기경이 1월 7일 교황으로 선출된다. 기슬리에리 추기경은 비오5세로 명명하여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자신에게 엄격하고 약자에게 약한 교황
비오5세는 즉위하자마자 로마라는 도시를 국민들이 살기 좋고 외세로부터 안전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엄격한 규율과 더불어 이전부터 추락한 도덕성을 회복하여 정치적인 안정과 더불어 재정적 안정까지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교황 스스로부터 예식과 더불어 의식주를 간소화하여 검소하게 만들고 화려한 교황청을 수도원처럼 만들었다. 즉위식마저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즉위식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고 재정이 어려운 수도원에 제공하라고 명령한다. 거기다 병원을 설립하게끔 지시하여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에 노출되어 치료하기 힘든 이들을 위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II. 성직자도 예외없음
그렇게 교황 자신 스스로조차 수도원의 수사처럼 하고 다니니 다음 타겟은 교황 이하 성직자들이였는데, 교구를 맡은 주교급 이상 성직자들의 부임지(교구) 상주 거주 의무화와 동물 학대 금지, 신성 모독 행위 금지, 성매매 금지등을 명령한다. 교황 자체가 수도자처럼 검소하게 다니면서 아래 성직자들역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교황청은 도덕적 근면의 모범적인 장소로 거듭나게 되면서 이후 행해질 개혁들의 기초가 완성되게 된다. 이러한 교황스스로의 애민정신에 로마 시민은 물론 신자들까지 교황을 향해 칭송을 하고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III. 전례
1569년 사도헌장 'Quo primum tempore'를 발표하여 1555년 트리엔트 공의회 교칙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전례 개혁 시작을 선포함으로서 신자들의 전례 생활과 더불어 모든 성직자들에게도 이를 적용하게끔 명한다. 이 때부터 처음으로 6세기경에 만들어진 성모곡인 아베 마리아(Ave Maria)가 수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보통 비오5세때부터 교황들이 하얀색 의복을 입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교황으로 있으면서도 입었던 도미니코회 수도복이 하얀색이였기 때문이였다.
IV. 유대인
유대인에 대한 문제는 당시 유럽 초강대국이던 스페인의 경우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가 스페인 영토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비오5세는 유대인들을 교황령 영토에 그대로 살게 두되 이들을 점진적으로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 이들을 미사에 참석하도록 하는 조건을 단다. 장기 프로젝트였던 앞선 내용은 기초로 깔아둔 채로 1567년 칙서 'Cum nos nuper'를 통해 교황령 내 유대인들이 이전부터 모은 재산과 토지를 매각하도록 하였고, 1569년 로마, 안코나, 아비뇽을 제외한 교황령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교서에 서명한다.
V. 위그노
비오5세는 위그노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고 카톨릭 국가 군주들에게 위그노를 소탕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교황령내 병력을 파견하는등의 행보를 보인다. 1569년 프랑스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의 편지를 받은 교황은 프랑스의 종교갈등이 격화되어 내전으로 번질 수 있음을 알려 1570년 생제르맹 평화 협정을 통해 프랑스 내 종교갈등의 불씨를 일시적으로 해소시키는데 앞장선다.
그러나 1570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 1533~1603, 재위1558~1603)을 이단으로 파문시키고 엘리자베스1세를 죽인 사람은 사면받을것이라 공언함과 동시에 통치권을 상실했다고 간주하고 사실상 교황령과 잉글랜드는 관계가 단절되기에 이르고, 폐위당하고 잉글랜드에 망명해있던 카톨릭 신자인 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ie Stuart, 1542~1587, 재위1542~1567)를 지지함으로서 잉글랜드에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지게 된다.
VI. 오스만 제국과 레판토 해전
1571년 하반기, 오스만 제국 파디샤 셀림2세(Selim II, 1524~1574, 재위1566~1574)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베네치아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베네치아 도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Sebastiano Venier, 1496~1578)는 위협을 느껴 교황에게 가서 이를 전하고, 교황 비오5세는 유럽 국가들의 연합을 도모하여 신성 동맹(1571)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신성 동맹군은 200여척의 전함과 3만의 병력을 모아 350척에 달하는 오스만 해군을 상대하기에 이른다. 1571년 10월 7일, 이오니아 해 레판토 해군기지에서 부딫힌 두 군대는 반나절동안에 걸친 전투를 행한 끝에 오스만 군을 섬멸하기에 이른다. 신성 동맹군도 적지않은 피해가 났지만 오스만군은 전력의 70%가 손실이 날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 전투로 지중해 바다의 제해권을 신성 동맹 유럽국가들에게 넘어가면서 오스만 제국의 위상이 점차 떨어지게 된다. 교황 비오5세는 이 전투의 승리를 매우 기뻐하였고 이후 전투 1년후인 1572년 10월 7일엔 이미 교황 비오5세가 선종하고 후임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13세(Gregorius PP. XIII, 1502~1585, 재위1572~1585)가 전투 승리 1주년을 기념하여 10월 7일을 '로자리오의 성모의 날'로 개칭한다.
선종
비오5세는 1572년 5월 1일 68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은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있던 우고 본콤파니 추기경이 그레고리오13세로 선출되어 즉위하게 된다. 비오5세 선종 후 100년이 지난 1672년 당시 교황 클레멘스10세(Clemens PP. X, 1590~1676, 재위1670~1676)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고 40년 뒤인 1712년 교황 클레멘스11세(Clemens PP. XI, 1649~1721, 재위1700~1721)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