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비오4세

Mintaka5 2025. 5. 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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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안젤로 데 메디치(Giovanni Angelo de' Medici)

224대 교황 비오4세(Pius PP. IV, 1499~1565, 재위1559~1565)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23대 교황 224대 교황 225대 교황
출신 나폴리 왕국, 나폴리 밀라노 공국, 밀라노 밀라노 공국, 보스코
명칭 바오로4세
Paulus PP. IV
비오4세
Pius PP. IV
비오5세
Pius PP. V
생몰년도 1476.06.28 ~ 1559.08.18 1499.03.31 ~ 1565.12.09 1504.01.17 ~ 1572.05.01
콘클라베기간 9일
(1555.05.15~1555.05.23)
3개월 20일
(1559.09.05~1559.12.25)
19일
(1565.12.20~1566.01.07)
재위 1555.05.23 ~ 1559.08.18 1559.12.25 ~ 1565.12.09 1566.01.07 ~ 1572.05.01

비오4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99년 3월 31일, 밀라노 공국 밀라노(Milano)에서 아버지 베르나르디노 메디치 디 마리냐노(Bernardino Medici di Marignano, 1465~1519)와 어머니 세실리아 세르벨론(Cecilia Cervellón, 1475~?)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24대 교황으로, 어려웠던 가정환경에서 여러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먼 친척가문이였던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Paulus PP. III, 1478~1534, 재위1523~1534)로부터 기용되기 시작해 바오로3세, 율리오3세, 마르첼로2세등에게 총애를 받고 여러 요직을 맡지만 보수적이고 엄격함을 갖춘 금욕주의 사상을 가진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와는 잦은 대립으로 인해 사실상 로마를 빠져나와 롬바르디아로 가서 4년간 건강을 보살피고 휴식을 취하는데, 1559년 콘클라베로 교황 비오4세가 된다. 그러나 이전 교황의 족벌주의를 강력하게 처벌하지만 자신의 친족은 추기경으로 서임시키는 행동패턴을 보이면서 앞뒤가 맞지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17~25회차 트리엔트 공의회(1562~1563)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같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후원하여 르네상스 후기 이탈리아의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유대인에게는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다스렸고, 프랑스 위그노 전쟁에 개입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하고자 했던 역사도 존재한다.    

 

성직

어릴적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 친구인 지롤라모 모로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파비아 대학교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교회법, 민법)을 전공하여 'Utroque iure'로 학위를 받고 법학자가 되어 법조계에 종사한다. 1527년 28세가 되었을 무렵 성직계에 종사하기로 결심하여 로마로 와서 사제 서품을 언제 받은지 정확하지 않지만 이때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1529년엔 조반니의 먼 친척인 피렌체 메디치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가 조반니를 불러들여 사도좌 대주교를 임명시킨다. 클레멘스7세 이후로도 즉위한 바오로3세(Paulus PP. III, 1468~1549, 재위1534~1549)로부터도 총애를받고 1549년 바오로3세로부터 추기경에 서품된다. 바오로3세의 후임 교황이되는 율리오3세(Lulius PP. III, 1487~1555, 재위1550~1555)의 치하에서도 인정받아 교황청 여러 요직을 거치지만 후임 교황 마르첼로2세(Marcellus PP. II, 1501~1555, 재위1555)가 즉위한지 1개월도 채 되지않아 선종하면서 다음 교황이 되고 엄격하고 보수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하고 독자적인 통치를 추구했던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때  교황의 엄격한 성정으로 잦은 마찰이 일어났고 더욱이 친 스페인파였던 조반니와 다른 노선인 반 스페인정책을 추구하던 교황 바오로4세의 눈에 나버려 1558년 교황청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떠나게 되면서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로 가서 휴식과 함께 좋지 않던 건강을 다스리는데 시간을 보내게 된다.  

 

1559년 콘클라베

1559년 교황 바오로4세가 83세(1476년생)의 나이로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559년 9월 5일부터 공식적인 콘클라베 날짜가 잡힘에 따라 추기경들이 로마로 모이기 시작하며 새 교황을 뽑는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총55명의 추기경 선거인단 중 8명이 불참한 47명이 참석한 콘클라베는 스페인 추기경단(17명)과 프랑스 추기경단(16명), 이탈리아 추기경(14명)으로 파벌이 나뉘어져서 경쟁하는데,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가 마상창시합에서 사고를 당해 급사해버리면서 어린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를 대신하여 섭정이 된 왕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가 사실상 통치하게 되지만 기즈 가문의 세력이 워낙 강성해 실권을 발휘하지 못하여 정치까지 어지러운 상황 위그노와 카톨릭간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는 시기로 불안정한 정국에서 스페인까지 프랑스 종교문제에 개입하려고 하자 스페인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의 대립은 더욱 격화된다. 1559년 9월 5일부터 12월 25일까지 무려 4개월에 가까운 시간동안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프랑스등이 개입하여 교회법상 어긋난 콘클라베로 로마 시민들도 분노하여 빨리 끝내라는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12월이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더욱 마음이 급해지는데,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조반니 안젤로 데 메디치 추기경이 자신의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비오4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바오로4세 족벌주의 청산과 자신의 족벌주의 

장장 4개월간의 긴 콘클라베가 끝나고 선출되어 즉위한 비오5세는 이듬해 1560년 1월 6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족벌주의가 행행했던 당시 전임 교황 바오로4세(교황은 카라파 가문 출신)의 조카 카를로 카라파(Carlo Carafa, 1517~1561)추기경과 팔리아노 공작 조반니 카라파(Giovanni Carafa, ?~1561)를 1561년 교수형으로 처형하여 교황령 국민들의 민심을 달래고 이전의 족벌주의로 자리를 꿰차고 이득을 챙긴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시킨다. 그러나 비오4세는 족벌주의 관행을 타파하는데는 엄청 엄격했지만 자신의 친족들은 추기경에 기용시키는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II. 트리엔트 공의회

1560년 11월 29일 칙서 'Ad ecclesiae regimen'을 발표해 공의회 소집을 발표하고, 1562년 1월 18일 열리는 17~25회차 트리엔트 공의회 공의회를 재개하기에 이른다. 유럽내 카톨릭 강대국(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들간의 다른 의견으로 인해 이전부터 열리던 공의회 장소인 트리엔트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개최하기를 요구했는데 스페인 왕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가 같은 장소에서 마무리를 지어야한다는 뜻을 밝혀 트리엔트에서 재개되게 된다. 1517년 신성로마제국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강력하게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간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에 대한 경고성 공의회 성격을 띠는데, 무조건 이단이냐 아니냐를 외치는 것 보다 카톨릭 교리의 한계를 정립시켜 이전까지의 행위에 대한 고해성사와 함께 카톨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일으켜 유럽을 재카톨릭화 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12월 4일 18년간(1545~1563)의 긴 여정을 끝내고 비오4세가 마감짓게 되며 1564년 '트리엔트 신앙 고백(Professio fidei Tridentina)'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어 최종 마무리되어진다. 당시 공의회를 통한개혁을 실천한 비오4세의 조카인 추기경이자 밀라노 대교구장인 성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 1538~1584)가 앞장서서 개혁을 실천한다.    

 

III. 프랑스 위그노 전쟁

이미 비오4세 즉위때부터 드려온 프랑스 위그노 전쟁의 구름은 1562년 3월에 시작되게 되면서 위그노들을 제압하기위해 교황은 프랑스 왕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 재위1560~1574)에게 교황군과 더불어 자금을 지원하여 이들을 토벌하게끔 유도한다. 1564년 나바라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 1528~1572, 재위1555~1572)가 개신교에 빠졌다(잔 달브레는 1560년부터 개신교로 개종)는 고발이 접수되어 종교재판을 열려고 하였지만 엄밀히 내정간섭이였던 교황의 행태에 프랑스 왕 샤를9세(사실상 섭정으로 어머니 카트린 메디시스가 프랑스를 이끌었다고 봐야 함)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이에 분노에 가득 찬 서신을 교황에게 보내 비오4세는 잔 달브레에 대한 종교 재판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IV. 유대인

1562년 칙서 '두둠 펠리시스(Dudum felicis)'발표를 통해 전임 교황 바오로4세(Paulus PP. IV, 1476~1559, 재위1555~1559)가 행했던 유대인에 대한 조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로마 내 유대인 게토의 숫자를 늘려 행위를 감시하는 대신 유대인들의 성서인 탈무드를 인쇄하는 것 까지는 허용하여 신앙에 있어서는 반강제적인 행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V. 예술과 과학

비오4세는 예술후원과 더불어 과학자들까지 후원했던 교황이였는데, 당대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로부터 의뢰한 포르타 피아,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Ricciarelli, 1509~1566)의 경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린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에서 인물들의 생식기와 엉덩이를 가리는 그림을 그리고 교황 비오4세가 누드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반바지 착용을 적용하라는 명을 받고 수행하게 되고 르네상스 음악가 조반니 마리아 나니노(Giovanni Maria Nanino, 1543~1607)를 후원하고 교회 음악 개혁을 장려하기 위해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등을 후원하기로도 유명했다. 

 

 

선종

1565년 12월 9일, 66세의 나이로 요로감염 합병증으로 인한 고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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