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에우제니오 마리아 주세페 조반니 파첼리(Eugenio Maria Giuseppe Giovanni Pacelli)
260대 교황 비오12세(Pius PP. XII, 1876~1958, 재위1939~1958)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59대 교황 | 260대 교황 | 261대 교황 |
출신 | 오스트리아 제국령 밀라노현, 데시오 | 이탈리아 왕국, 로마 | 이탈리아 왕국, 소토일몬테 |
명칭 | 비오11세 Pius PP. XI |
비오12세 Pius PP. XII |
요한23세 Ioannes PP. XXIII |
생몰년도 | 1857.05.31 ~ 1939.02.10 | 1876.03.02 ~ 1958.10.09 | 1881.11.25 ~ 1963.06.03 |
콘클라베기간 | 5일 (1922.02.02~1922.02.06) |
2일 (1939.03.01~1939.03.02) |
4일 (1958.10.25~1958.10.28) |
재위 | 1922.02.06 ~ 1939.02.10 | 1939.03.02 ~ 1958.10.09 | 1958.10.28 ~ 1963.06.03 |
출생
1876년 3월 2일, 이탈리아 왕국 로마(Rome)에서 아버지 사크라 로타 필리포 파첼리(Sacra Rota Filippo Pacelli, 1837~1916)와 어머니(Virginia Graziosi, 1844~192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60대 교황으로, 1939년 3월에 즉위한 이후 불과 6개월만에 2차 세계대전(1939.09.01~1945.09.02)이 발발하고 미국과소련의 냉전이 한창 시작되고 지속되던 때 재위한 교황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논란이 진행중인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으로 비판도 크지만 행동으로서 유대인, 피해자, 군인, 실종자들을 위해 몸소 바티칸과 교황휴양지에 이들을 보살피고 직접 유대인들을위해 여권, 직업추천서등을 작성해 많은 유대인들을 구한 교황이기도 하다. 2020년 3월2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 PP., 1936~2025, 재위2013~2025)에 의해 재위기간(1939~1958)동안 작성된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년
로마의 귀족가문인 파첼리 가문에서 태어난 에우제니오는 교황청에서 여러 가족들이 일을 하였고, 교황들과 인연이 많은 귀족집안인 파첼리가문의 셋째 아들로서 할아버지 마르칸토니오 파첼리(Marcantonio Pacelli, 1804~1902)와 사촌인 프로스페로 카테리니(Prospero Caterini, 1795~1881) 추기경의 활동덕에 교황 비오9세(Pius PP. IX, 1792~1878, 재위1846~1878)와도 밀접한 연관이 되어있었는데 에우제니오는 마침 어릴적부터 사제로서의 소명을 느껴 카톨릭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교황 그레고리오 대학교(1894-1899)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1899년 프란체스코 디파올라 카세타(Francesco di Paola Cassetta, 1841~1919)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성직
형인 프란체스코 파첼리(Francesco Pacelli, 1872~1935)는 교회법 법률가로서 교황청 법률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에우제니오는 1901년 빈첸초 반누텔리(Vincenzo Vannutelli, 1836~1930)추기경의 추천을 받아 특무성성에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1904년 교황 의전관, 1905년에는 29세의 아주 젊은 나이에 몬시뇰이 된다. 외교에 능력이 있던 에우제니오는 교황 레오13세(Leo PP. XIII, 1810~1903, 재위1878~1903)의 눈에 들어 1901년 서거한 영국 여왕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 재위1837~1901)의 조사 작성, 교황청 대표로서 영국에 자주 방문하고 1911년 조지5세(George V, 1865~1936, 재위1910~1936)의 즉위식때도 참석하는등의 행보를 보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1914.07.28~1918.11.11)이 발발하고 전쟁기간동안 전쟁 포로들의 명단을 기재하는 역할을 하고 전쟁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 발발지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가서 황제 프란츠 요제프1세(Franz Joseph I, 1830~1916, 재위1848~1916)를 만나 수차례 교섭을 벌이지만 크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교황 베네딕토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로부터 명의주교, 바이에른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시키고 곧바로 대주교로 승품된다. 그렇게 독일 바이에른으로 가서 1918년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실에서 같이 고생을 하는데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대항해 일어난 1월 봉기로 인해 에우제니오가 있던 교황청 대사관역시 포위당해 이들에게 위협을 받지만 에우제니오는 굴복하지않고 자리를 지키고 이들이 물러가고난 뒤 바이에른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 전체를 관장하는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베를린으로 이동한다. 에우제니오의 독일 생활은 1917년부터 1929년까지 12년간 지속된다.
추기경
1929년 에우제니오 파첼리 대주교는 12년간의 교황 대사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1857~1939, 재위1922~1939)의 환대9를 받고 곧바로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고 교황청 국무원장에 임명된다. 이미 이전부터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에우제니오 추기경은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에도 유럽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고 정교조약을 체결하러 다니는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다.
아돌프 히틀러
에우제니오는 독일 뮌헨에 머무르고 있을 1918년 당시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잠시 야인 생활을 하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만난적이 있었는데, 이 때 에우제니오는 뮌헨 공산주의 폭동에 휘말려 교황 대사관 관저로 쳐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이 협박해도 관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이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직접 겪고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나치당의 전신이였던 당시 독일 노동자당 일원이였던 히틀러가 뮌헨에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리는데, 히틀러가 정권을 완전히 잡은 1933년이 되기 15년 전이라는 점은 감안했을 때 누구도 히틀러의 위험성은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만큼 객관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그러나 파시스트당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에게도 반공을 위해서 손을 잡는 것까지 하는등 사실상 논란이 될만한 행동들을 했다. 에우제니오는 1933년 히틀러가 나치당 총수로 총리에 오르고 전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본인 스스로도 히틀러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긴 한다. 더욱이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로마에서 제국헌장조약에 서명하여 독일 내 카톨릭 신자들의 권리 보장을 약속하지만 이후 점점 에우제니오와 히틀러사이가 멀어지면서 히틀러는 조약내용을 무시하고 독일 내 카톨릭을 탄압하고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시키는등 점점 강경해져만 간다.
1939년 콘클라베
1939년 2월 초,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1857~1939, 재위1922~1939)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열린다. 1939년 3월1일에서 2일까지 이틀간 62명의 추기경 선거인단들이 투표에 참가하여 3차례에 걸쳐 투표를 실시한 결과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렇게 에우제니오 추기경은 비오12세로 명명하고 1939년 3월 2일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즉위 초기
한창 전체주의로 변모해 시한폭탄과 같던 당시 유럽의 상황에서 즉위한 비오12세는 큰 전쟁이 터질 것을 우려해 유럽 각국에 주의를 당부함과 동시에 각국 신자들의 영적인 관심을 촉구하여 평화를 기원하도록 수차례 서신을 대사들에게 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39년 8월 23일 2차 세계대전(1939.09.01~1945.09.02)이 발발하기 1주일 전 나치 독일은 소련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일-소련 불가침조약, Molotov-Ribbentrop Pact, 1939.08.23)을 체결함으로서 사실상 불가침 조약을 맺어 나치 독일은 소련에 대한 걱정을 덜음과 동시에 전쟁이 언제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된다.
II. 2차 세계대전 발발
결국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선전포고로 대응하면서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서 확전된다. 비오12세는 전전임 교황인 베네딕토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가 즉위했을 당시 터진 제1차 세계대전(1914.07.28~1918.11.11)때 베네딕토15세가 어느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던 점을 본받아 비오12세 스스로도 중립을 고수한다. 2차대전이 발발한지 1달이 지난 10월 20일 공식석상에서 회칙인 '수미 뽄띠삐까투스'(Summi Pontificatus, 1939.10.20)를 통해 전쟁 반대의사를 표명하는데 비록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당의 전체주의 정권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적 위기'와 '반기독교 이념'등의 단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을 언급하여 현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2차대전 초기 단숨에 점령당해버린 폴란드에 애도를 표하며 평화를 촉구한다. 1939년 11월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매우 강력하게 비난하고 여러 국가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연대를 표하고 교황은 피해를 입은 주민들과 전쟁포로등에게 지원을 하고 실종자들을 찾기위한 정보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는등 노력을 기울인다.
III. 확전
비오12세는 여러 나치 독일의 장군들과 영국 정부 대표들과 수십차례 비밀 회동을 통해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중개자로서 직접 발로 뛰어나서면서 동시에 파시스트당의 이탈리아가 2차대전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자 시도한다. 이는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3세(Vittorio Emanuele III, 1869~1947, 이탈리아재위1900~1946, 에티오피아황제1936~1941)를 직접 방문하여 설득하지만 결국 이탈리아도 1940년 6월 10일에 2차대전에 참전해버리고 만다. 비오12세의 바람과는 반대로 지속적인 나치 독일의 승전에 심히 우려를 표하였고 게다가 1943년 7월엔 산 로렌초 성당이 폭격당해버린다. 직접적으로 바티칸이 폭격의 위험에 노출되면서 비오12세는 바티칸을 떠나 산 조반니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방문중에도 교황은 폭격의 위험에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중들을 만나고 피해자들과 사망자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기도를 하여 교황의 흰색 수단이 붉게 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IV. 비오12세의 침묵과 행동
어찌저찌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온 비오12세는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민간인 피해자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수많은 군인들이 죽음에도 이에 항의를 하지 않는데, 특히 나치 독일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침묵을 한다. 그러나 비오12세는 침묵과는 별개로 주권국인 바티칸에 유대인과 피해자들의 피난처를 제공하는등 행동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히틀러는 바티칸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던 교황 비오12세를 체포하는 내용이 최근에서야 공개가 되었다. 비오12세는 이에 자신이 체포될 상황을 대비해 교황 사임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는 체포되었을 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조속히 콘클라베를 열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비오12세는 바티칸에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수백명의 유대인과 피해자를, 교황의 여름 휴양지 카스텔간돌포(Castel Gandolfo)에는 3천여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숨겨주고 남미로 피신시키고 더 많은 유대인들을 위해 직접 여권, 경비, 직업추천서등 서류들을 마련해주는등의 밤낮없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심지어 로마 게토에 있던 유대인 수백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보석금을 내주는등의 노력을 한다. 침묵과는 별개로 행동으로서는 이들을 도운것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도적인 중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냐 충분히 권위를 통해서 더 많이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더 많이 구할수 있었지 않느냐로 논란이 지속되고있다. 2020년 3월 2일 비오12세 재위기간(1939-1958)도중 작성된 문서에 대한 봉인이 공식 해제되어 풀리고 현재도 분석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V. 카를 볼프
히틀러는 교황 비오12세를 자신의 목적을 취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해 교황을 납치하고 바티칸까지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워 일명 '라바트 작전'으로 불리는 작전을 1943년 하달하게 된다. 이는 로마에서 연합국에 의해 후퇴하기 직전 히틀러가 나치SS대장 장군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Karl Friedrich Otto Wolff, 1900~1984)에게 이 작전을 추진하도록 지시하게 된다. 볼프는 명을 받고 로마로 갔는데 사복 차림으로 비오12세를 은밀하게 알현해 이러한 계획을 알리고 스스로 이 명령을 이행할 뜻이 없다고 밝히고 현 상황이 위험하니 조심하시라고 언급한다. 비오12세는 볼프의 진심을 시험하기 위해 곧 처형될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지도자 2인을 석방할 것을 요청하는데 실제로 이들을 볼프가 석방시킴에 따라 진심을 믿었다고 한다.
VI. 종전
1944년 6월6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고 연합군들이 속속들이 나치 독일로 진군하고 이미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패배한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의해 로마까지 내어주고 비오12세는 바티칸에서 연합군을 접견한다. 그렇게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투는 공식 종료된다. 비오12세는 1차대전이 끝나고 승전국들이 패전국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게 되면서 2차대전이 터지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이런 결과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이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줄 것을 호소한다.
종전이후
6년간의 긴 2차대전이 끝나고 황폐화된 유럽에 지원과 동시에 국가간 외교관계 발전등에 중심을 두고 행동한 비오12세는 1950년 평화적 의도로 희년을 선포함으로서 종전으로 재정능력이 부족하던 이탈리아의 반대 의사표명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는데 희년 행사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물질적으로 종교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둔 희년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급변화하는 현대사회의 급물살에 교회의 변혁에도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논의하는등 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위치에도 있었다. 특히나 전통 보수적인 성향을 추구하던 비오12세는 진보의 이점을 알면서도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진행됨에 따라 다시 국제 정세가 불안정하게 흘러감에 따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 한발자국 물러나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것을 결심하게 된다.
선종
1958년 10월 9일, 82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