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비오9세

Mintaka5 2025. 4. 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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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255대 교황 비오9세(Pius PP. IX, 1792~1878, 재위1846~1878)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54대 교황 255대 교황 256대 교황
출신 베네치아 공화국, 벨루노 교황령, 세니갈리아 프랑스령 교황령, 아나니
명칭 그레고리오16세
Gregorius PP. XVI
비오9세
Pius PP. IX
레오13세
Leo PP. XIII
생몰년도 1765.09.18 ~ 1846.06.01 1792.05.13 ~ 1878.02.07 1810.03.02 ~ 1903.07.20
콘클라베기간 1개월 20일
(1830.12.14~1831.02.02)
3일
(1846.06.14~1846.06.16)
3일
(1878.02.18~1878.02.20)
재위 1831.02.02 ~ 1846.06.01 1846.06.16 ~ 1878.02.07 1878.02.20 ~ 1903.07.20

비오9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92년 교황령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 아버지 지롤라모 베네데토 가스파레 마스타이 페레티(Girolamo Benedetto Gaspare Mastai Ferretti, 1750~1833)와 어머니 카테리나 안토니아 마달레나 솔라지(Caterina Antonia Maddalena Solazzi, 1764~1842)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55대 교황으로 초대 교황 베드로(1?~67, 재위33~67)다음으로 오래 재위한 교황(31년 7개월)으로 남아있는 인물이다.  1819년 사제 서품을 받고 수년간 남미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1827년 교황 레오12세(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1829)에 의해 대주교에 서임되고 1839년 인 펙토레 추기경, 1841년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된다. 1846년 교황 그레고리오16세(Gregorius PP. XVI, 1765~1846, 재위1831~1846)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9세로 명명하고 즉위한다. 교황으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정치적인 영향 없이 표를 얻어 선출된 교황으로서 딱히 특정 국가에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다가 온건 진보성향의 교황을 유럽내 국가에서도 열렬히 반기지만, 그러나 1859년 페루자 학살사건을 주도한 교황이기도 하다. 교황령을 통치한 마지막 교황인데 1860년부터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 샤르데냐재위1849~1861, 이탈리아재위1861~1878)와 영토를 두고 경쟁하다가 교황령 대부분을 잃지만 1866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가 교황 보장법을 승인하면서 영토 지배권은 이탈리아에 넘어가는 대신 이탈리아 왕국 영토 내 독립적 주권국을 둬 종교활동을 보장하게끔 해주게 한다만 1870년 9월20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의 이탈리아군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교황의 권리를 모두 빼앗아간다. 비오9세는 바티칸의 포로를 자청하면서 속령을 상실하여 정치력을 잃은 대신 카톨릭 내적인 영향력이 증대되는 계기가 된다. 조선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 박해당한 순교자들을 대우해 이들을 시복시켰고 1869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권위를 세우고자 하지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07.19~1871.01.28)과 교황령 점령등으로 흐지부지된다.    

 

초년

귀족집안 페레티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는 1799년 태어난 곳인 세니갈리아에서 주교 베르나르디노 호노라티(Bernardino Honorati, 1724~1807)추기경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고 1814년 사제인 삼촌 파올리노 마스타이 페레티(Paolino Mastai-Ferretti, 1756~1820)의 집에 머물면서 신학생이되었다가 1815년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의 귀족 근위대에 입대하였다가 간질(1797년 개울에 빠지면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간질 발작이 생김)발작으로 전역 후 비오7세를 알현하여 신학공부 독려와함께 격려를 받으며 신학공부에 몰두하여 1818년 부제 서품, 1819년 세니갈리아 주교 파브리치오 스케베라스 테스타페라타(Fabrizio Sceberras Testaferrata, 1757~1843, 세니갈리아주교1818~1843)추기경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다. 

 

성직

1819년 사제로 서품된 이후 로마 타타 조반니 학교 학장으로 부임하고 4년간 직무를 맡다가 1823년 7월 교황 비오7세의 명으로 남미 칠레 주재 교황 대사인 조반니 무치 몬시뇰(Giovanni Muzi, 1772~1849)의 보좌 사제로 파견되어 1825년 6월까지 2년의 시간을 남미에서 포교 활동을 한다. 그렇게 조반니는 이후 교황 비오9세가 되었을 때 이러한 행보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최초의 교황 타이틀을 얻게 된다. 수개월의 항해 끝에 1824년 3월에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들은 병자들을 돌보고 신도들을 위해 미사를 직접 집전하는등 헌신을 하다가 우루과이에서 2개월 체류 후 1825년 6월 다시 이탈리아 땅을 밟게 된다. 다시 돌아온 조반니는 교황 레오12세(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1829)로부터 의전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명을 받아 직무를 다하고 1827년 불과35세의 나이로 대주교로 서임되고 스폴레토 대주교 임무를  맡게한다. 로마 타타 조반니에서 학장을 맡은 경험을 통해 스폴레토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품과 동시에 종교적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게끔 하고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스스로 나서서 중재를 자처하면서 신도들에게 따뜻한 이미지가 각인된다. 1839년 교황 그레고리오16세(Gregorius PP. XVI, 1765~1846, 재위1831~1846)로부터 인 펙토레 추기경으로 지명되고 1841년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된다. 

 

1846년 콘클라베

교황 그레고리오16세가 1846년 6월 1일 선종함으로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총62명에 달하는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아래표와 같은 교황으로부터 임명된 추기경들이다. 

  임명된 추기경 수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로부터 임명된 추기경 2명
레오12세(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1829)로부터 임명된 추기경 7명
그레고리오16세(Gregorius PP. XVI, 1765~1846, 재위1831~1846)로부터 임명된 추기경 53명

 62명의 추기경들중 50명이 투표에 참석해 1846년 6월 14일부터 6월 16일까지 3일에 걸쳐 투표를 진행한 결과 조반니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어린시절 자신을 격려했던 교황 비오7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비오9세로 명명한 후 즉위한다. 

 

교황

크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비오9세는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인물이였고 교황청 내에서도 딱히 존재감이 도드라지던인물도 아니였는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로서 교황 선출 후 많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임 교황들도 행했던 것 처럼 900여명에 달하는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사면시켰고 자유주의적 요구를 해오던 교황령 국민들에대해서도 점진적, 온건적으로 통치를 시작하며 슬슬 개혁을 단행할 준비를하게 한다. 그 결과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추기경 주세페 보폰디(Giuseppe Bofondi, 1795~1867)를 교황령 총리로 임명하여 그 믿음을 곤고히 하고 평신도 대표들에게도 모든 정책을 개방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국민들 또한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된다.    

 

I. 1848년 혁명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를 몰아내고 시민왕(Le roi citoyen)칭호를 받으며 즉위한 루이 필리프1세(Louis-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0~1848)가 2월혁명으로 퇴위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되는등 프랑스를 기점으로 유럽에 혁명의 영향이 끼치면서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자유주의 정부를 원하는 인물들로 구성한 혁명이 일어난다. 생각보다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도 이 때를 틈타 이탈리아의 통일을 꾀하던 샤르데냐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 1798~1849, 재위1831~1849)는 교황 비오9세의 지지를 받아 당시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지만 여러차례 패배한 후 휴전협정을 체결하여 마무리된다.  

 

II. 로마 공화국

교황청 경찰부 장관이자 임시 재무부 장관인 펠레그리노 로시가 1848년 9월 임명이후 11월에 칸첼레리아 궁전 계단에서 암살을 당하면서 위협을 느낀 교황 비오9세는 일반 사제 복장을 하고 로마에서 피신한다. 로시 암살이후 혁명에 지지하는 인물들은 로시의 빈자리를 메꿀 새 정부를 구성하는 조건을 비오9세에게 제시하는데 타협을 하기 싫었던 비오9세였지만 협상을 결렬시킬시 더 큰 내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피신한 것이다. 교황의 의지와 상관없이 혁명에 지지하는 인물 3인들은 1849년 2월 로마 공화국을 선포해 헌법까지 발표하는데까지 성공하면서 동시에 교황 비오9세에게는 억압이아닌 나름 권리를 보장해주는 행보를보이며 형식상으로 비오9세로부터 임명을 받는다. 아래 표는 로마 공화국을 구성한 3인을 정리한 표이다. 

  생몰년도 직위
주세페 마치니
Giuseppe Mazzini
1805 ~ 1872 집정관
아우렐리오 사피
Aurelio Saffi
1819 ~ 1890
카를로 아르멜리니
Carlo Armellini
1777 ~ 1863

  그러나 1849년 2월 선포된 로마 공화국은 불과 2개월뒤인 4월에 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 샤를 루이 나폴레옹(미래의 나폴레옹3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 대통령재임1848~1852, 황제재위1852~1870)이 로마로 쳐들어오면서 나름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장군이 프랑스군에 승리하여 잘 막아주었지만 막대한 화력으로 6월에 로마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들의 천하는 1년으로 끝나고 이에 양시칠리아 왕국에 피신해있던 교황 비오9세는 1850년 마침내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III. 로마 복귀 이후

로마로 돌아온 비오9세는 멸망한 로마 공화국의 헌법을 폐지하고 혼란속에 재정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교황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세금을부여하고 이전부터 추구하려던 개혁과 더불어 교육, 재정위원회 설립, 국가기반시설 건설등으로 경제성장을 꾀하고 그 효과가 보이게 되면서 1851년부터 교황령의 재정이 안정되기에 이른다.  

 

IV. 페루자 학살사건

1859년 6월 중부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교황령에 속해있던 지역이였는데, 당시 자유주의의 바람이 계속 불며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그들의 정부까지 수립하게 되면서 교황 비오9세의 눈엣가시가 되고 만다. 이미 페루자 봉기 이전부터 볼로냐, 페라라, 포를리, 라벤나등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들의 의지가 고무되어있던 시점에 교황 비오9세는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하라는 명을내리고 스위스 용병 대장인 안톤 슈미트 대령()의 1700여명의 병력을 페루자로 보낸다. 그들은 페루자에 진입해 반군을 학살하고 여성과 어린이까지 학살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는데 이 사건이 페루자 학살사건으로 남아있다.    

 

V. 이탈리아 통일

그렇게 페루자가 약탈당하고 권위를 세운 비오9세는 이후 1861년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면서 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 샤르데냐재위1849~1861, 이탈리아재위1861~1878)와 대립이 시작되는데, 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도 지지않고 반교황 세력과 접촉해 아예 교황령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시키려는 움직임을보이면서 점점 전투가 격화된다. 그와 동시에 1869년 12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카톨릭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위해 노력하지만 예상치못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07.19~1871.01.28)이 터지면서 교황의 배경을 지원하던 나폴레옹3세(Napoléon III, 1808~1873, 대통령재임1848~1852, 황제재위1852~1870)가 전쟁에서 사실상 프로이센에게 패하는 형국이 되면서 몰락함에 따라 1870년 9월 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가 로마 점령 후 교황의 신변 보호를 약속하는 선에서 로마를 점령한다. 비오9세는 새로운 국가를 끝내 선종하기까지 인정하지 않고 이는 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이 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VI.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급변하던 이탈리아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교황 비오9세는 1869년 12월 8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다. 카톨릭의 수장으로서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교회 헌장을발표해 더욱이 권위를 높이고자 했지만 일부 카톨릭 세력이 반발해 새로운 교파가 만들어지기도 하는등 복잡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나 1870년까지 지속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7월 19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터지면서 정상적인 공의회 진행이 되지 않고 1870년 9월 교황령이 점령당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면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중단되기에 이른다.    

 

선종

1878년 2월 7일 86세의 나이로 어릴적부터 앓아왔던 간질 발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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