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261대 교황 요한23세(Ioannes PP. XXIII, 1881~1963, 재위1958~1963)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60대 교황 | 261대 교황 | 262대 교황 |
출신 | 이탈리아 왕국, 로마 | 이탈리아 왕국, 베르가모 | 이탈리아, 콘체시오 |
명칭 | 비오12세 Pius PP. XII |
요한23세 Ioannes PP. XXIII |
바오로6세 Paulus PP. VI |
생몰년도 | 1876.03.02 ~ 1958.10.09 | 1881.11.25 ~ 1963.06.03 | 1897.09.26 ~ 1978.08.06 |
콘클라베기간 | 2일 (1939.03.01~1939.03.02) |
4일 (1958.10.25~1958.10.28) |
3일 (1963.06.19~1963.06.21) |
재위 | 1939.03.02 ~ 1958.10.09 | 1958.10.28 ~ 1963.06.03 | 1963.06.21 ~ 1978.08.06 |
출생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왕국 베르가모 소토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론칼리(Giovanni Battista Roncalli, 1854~1935)와 어머니 마리아나 마졸라(Marianna Mazzola, 1855~1939)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61대 교황으로 보수적인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교회를 모든이들과 소통하는 곳으로 변화시키기위해 노력한 교황이다. 겸손한 성격과 특유의 따뜻함으로 많은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자비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정도로 인품이 훌륭했다고 한다. 추기경시절 뛰어난 외교실력까지 갖춰 당시 2차대전(1939.09.01~1945.09.02)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함께 핵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던 시기에 분쟁을 조절하고 두 열강의 사이를 중재하는 점이 높게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외에도 빈부격차, 노동자들의 부당대우등 직면한 현안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교황이기도 하다. 1958년 교황 비오12세(Pius PP. XII, 1876~1958, 재위1939~1958)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23세로 즉위하는데 당시 추기경들은 이미 요한23세가 선출될 당시77세의 고령인점과 건강이 좋지않은점을 꼽아 크게 일을 벌이지 않고 조용하게 즉위하다가 선종할 것이라는 관측에 교황으로 선출시켰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서 카톨릭 교회의 대변화를 불어일으키는 개혁의 서막을 연다. 재위기간은 5년으로 짧은 편이였지만 큰 변화를 꾀하고 추구하고자 했던 교황으로 남아있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교황인데, 1962년 3월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서울대목구, 대구대목구, 광주대목구가 각각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같은해 9월 순천에 홍수가 나 어려움을 겪을 때 1만달러를 순천시에 후원하는등의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초년
농민 계층에서 태어난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는 공직에 종사하던 아버지로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신학교에 들어가고자 마음을 먹어 1889년 베르가모 주교 가에타노 카밀로 귄다니(Gaetano Camillo Guindani, 1834~1904)대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고 삼촌의 지원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간다. 이후 장학금을 받으면서 신학을 전공하여 학업을 마칠 수있었다. 1904년 사제 서품을받고 자코모 마리아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Giacomo Maria Radini-Tedeschi, 1857~1914)의 눈에 들어 주교의 비서로 일하면서 경험을쌓게 되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테데스키 주교의 행보를 같이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론칼리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1914.07.28~1918~11.11)이 발발하면서 론칼리는 이탈리아 육군으로 징집되어 군병원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면서 복무하게 되는데 이는 직접 전쟁의 참상을 겪은 론칼리에게 평화를 갈망하게 하는 사건으로 남아있게 된다.
부름
1차대전이 1918년 종전되고 전역 후 1919년 신학교로 다시 돌아온 론칼리는 2년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PP. XV, 1854~1922, 재위1914~1922)의 부름을 받아 교황청 전교회 지부장에 임명시켜 조직을 관리하고 규모를 키우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후 교황청 외교관에 해당하던 순시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주교품까지 수여하면서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불가리아로 파견되어 동방정교회 신자가 다수이던 이곳에서 사목활동과 더불어 어려운 이들과 함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10년간의 만족할만한 업무수행을 인정받아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1857~1939, 재위1922~1939)로부터 1935년 터키, 그리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면서 역시 이곳에서도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이슬람교까지 존중하면서 이들과 대화를 통해 더불어 지냈다.
2차대전
교황 비오11세가 1939년 2월 10일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선출되어 비오12세(Pius PP. XII, 1876~1958, 재위1939~1958)로 명명되어 즉위한다. 론칼리는 이 시기 큰 아픔을 겪는데, 아직 터키, 그리스에 파견되어있던 이 때 형제들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는데 그해 2월 10일 비오11세가 선종하였고 어머니마저 2월 20일에 사망하였지만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입장에 어머니의 임종도 참석하지 못하고 비오11세의 장례 미사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해 9월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시기에 론칼리는 불가리아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않아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 비오12세를 알현하여 그리스, 터키에 계속 체류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떠난다. 론칼리는 2차대전이 격화됨에 따라 유대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두눈으로 목격하고 그리스, 터키등에서 여러 정부인사들과 각국 대사들과 긴밀하게협의해 유대인들을 구하고 돕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여러번 간청하여 행동으로 보여지게 되었고, 당시 앙카라 주재 독일 대사인 카톨릭 신자였던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 1879~1969, 터키주재 독일대사 재임1939~1944)과 긴밀히 협약해 2만여명에 달하는 수용소로 보내질 유대인을 빼돌려 이들을 구제하는데 밤낮으로 일하며 앞장섰다.
1944년 12월에 교황 비오12세로부터 파리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프랑스는 1944년 여름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파리가 연합국에의해 다시 탈환되고 이전에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나치에 협력했던 카톨릭 주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느냐는일로 분열이 일고 있었던 터라 문제가 복잡했던 상황이였다. 그렇게 추려낸 나치 부역 주교 수십여명을 프랑스 정부가 교황청으로부터 소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론칼리는 나치 부역 주교들이 나치에 부역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소환시키지는 못하고 대신 물증은 없었으나 혐의성이 짙었던 주교3명이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 차원에서 마무리되고 이듬해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함으로서 유럽에서는 전쟁이 종료된다. 론칼리는 2차대전동안 교황 대사의 지위를 이용해서 수많은 유대인들과 난민을 구출하는데 밤낮가리지않고 활동을 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추기경 서품
1953년 1월 교황 비오12세로부터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면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총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곳에서도 열심히 사목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미 추기경 서임당시 72세였던 론칼리는 베네치아에서 조용하게 은퇴를 하고싶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아니하였다.
1958년 콘클라베
1958년 10월 교황 비오12세가 선종한다. 이에 론칼리 추기경은 로마로 와서 콘클라베에 참석하는데 추기경들은 론칼리 추기경이 이미 77세의 고령에다가 건강까지 좋지 않아 잠시 교황직을 수행하여 조용하게 보내기위해 론칼리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여 요한23세로 명명되어 즉위하는데, 추기경들은 이때까지 자신들이 큰 실수를 자행한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교황
요한23세가 즉위한 이후 추기경들의 바람대로 조용하게 재위기간을 보냈으면 했던 바람은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즉위하면서부터 카톨릭 교회 개혁에 시동을 걸면서 1959년에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대 발표를 하게 된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추기경들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 4년에 가까운 시간을 준비하는데 정신없이 보내는 현실에 다들 정신이 없었다고들 한다. 그렇게 1962년 10월 바티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회되기에 이른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섰고 요한23세는 이들에게 각 위원회 구성원들을 선출시켜 일을 시킨다. 여러 회기에 달하는 공의회는 교황의 예우, 전례, 교회, 교황청 재정등 수많은 개혁을 시행하면서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접근하여 문제들을 다듬고자 하였다. 더욱이 요한23세는 재위기간동안 세계의 평화와 더불어 타종교들과의 대화, 개신교와의 일치운동등으로 평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조화를 이루고자 발벗고나서 활동한 교황으로 남아있다. 더욱이 공의회 당해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의 공포가 도사리게 되면서 교황이 직접 나서 냉전중이던 미국과 소련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여 양측은 교황의 중재로 당면했던 위기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선종
1963년 교황 요한23세는 선종한다.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위암 진단을받았으나 공의회라는 큰 행사 직전이라 이를숨겼고 아픈 몸을 이끌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직접 중재하며 해결했다. '자비의 교황'이라는 수식어가 붙을정도로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교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