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263대 교황 요한 바오로1세(Ioannes Paulus PP. I, 1912~1978, 재위1978)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62대 교황 | 263대 교황 | 264대 교황 |
출신 | 이탈리아, 콘체시오 | 이탈리아, 카날레다고르도 | 폴란드, 바도비체 |
명칭 | 바오로6세 Paulus PP. VI |
요한 바오로1세 Ioannes Paulus PP. I |
요한 바오로2세 Ioannes Paulus PP. II |
생몰년도 | 1897.09.26 ~ 1978.08.06 | 1912.10.17 ~ 1978.09.28 | 1920.05.18 ~ 2005.04.02 |
콘클라베기간 | 3일 (1963.06.19~1963.06.21) |
2일 (1978.08.25~1978.08.26) |
3일 (1978.10.14~1978.10.16) |
재위 | 1963.06.21 ~ 1978.08.06 | 1978.08.26 ~ 1978.09.28 | 1978.10.16 ~ 2005.04.02 |
출생
1912년 이탈리아 왕국 포르노디카날레(현 이탈리아 베네토주 벨루노 카날레다고르도)에서 아버지 조반니 루치아니(Giovanni Luciani, 1872~1952)와 어머니 보르톨라 탄콘(Bortola Tancon, 1879~1948)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63대 교황으로 역대 교황중 재위기간이 1개월이 채 되지않는 교황중 한명으로 비록 교황직에는오래 있지 못했지만 평소 겸손한 성품과 몸소 행동하는 강론을 보여 목회를 함에 따라 온화한 설교를 받은 많은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전임 교황 바오로6세(Paulus PP. VI, 1897~1978, 재위1963~1978)때 단행한 개혁으로 80세 이상의 추기경에게 콘클라베 투표권을 주지않고 비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을 임명하는 분위기였지만 신자들 뿐만아니라 교황청 내에서도 인망과 덕망이 높던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 바오로1세로 명명되어 즉위하게된다. 교황으로 선출되고난 후에도 전임 교황 바오로6세의 개혁조치를 그대로 따른다. 25일의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띤 교황이라는 별명답게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영성 활동에 주력하여 이러한 교황의 모습에 카톨릭 내에서도 탈세속화가 가속화되면서 변화가 이루어졌고 교황은 신자들과 일반사람들에게도 다정하게 미소를 남긴 교황으로서 많은 지지를 받지만 즉위 1개월도 채 되지않은 시점에 나빠진 건강으로 인해 급성 심근경색으로 선종한다. 선종 후 39년이 지난 2017년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 PP., 1936~2025, 재위2013~2025)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된다.
초년
1923년 11살의 나이로 펠트레 소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벨루노 대신학교로 옮겨 교육을 받아 1935년 사제 서품을받는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연구소, 신학교, 보좌 신부, 교리 교사등 다양한 직종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1947년 교황 그레고리오 대하겡서 신학 학사를 받은 뒤 벨루노 교구 교구장 지롤라모 바르톨로메오 보르티뇽(Girolamo Bartolomeo Bortignon, 1905~1992)대주교로부터 벨루노 교구 주교 대법관으로 임명된다.
성직
1935년 사제 서품, 1958년 교황 요한23세(Ioannes PP. XXIII, 1881~1963, 재위1958~1963)가 즉위하면서 알비노 루치아니는 베네토의 주교로 임명된다. 주교로 활동하는 동안 청소년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여 1950년대 당시 제한적이던 평신도의 교회 활동을 장려하고, 청소년들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게끔 하는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높은 위치에서도 쉽게 다가가 특유의 선량함으로 신도들을 격려하고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1962년엔 부룬디 최초의 대주교 앙드레 마카라키자(André Makarakiza, 1919~2004)가 루치아니 주교에게 이 곳으로 사제 몇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겸 찾아오게 된다. 루치아니는 이에 동의하여 3명의 선교사를 추려 보내는데 교구의 재정난으로 이들은 딱히 재정 지원없이 그대로 부룬디로 향하게 된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목활동을 벌여 이들에게 카톨릭을 전파하였고 1966년 8월 2주간 루치아니가 아프리카 부룬디를 직접 사목 방문하여 지역 주민들과함께 어울려 언어와 관습을배우고 미사를 직접 집전하는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스스로 보인다. 1962년부터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전회차에 모두 참석하여 카톨릭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요한23세와 1963년 즉위하는 바오로6세(Paulus PP. VI, 1897~1978, 재위1963~1978)의 뜻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스스로를 더욱 세속과 종교적으로 권위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을 보인다. 1969년에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대주교로 서임되어 베네치아 총대주교에 임명된 이후 4년뒤인 1973년엔 역시 바오로6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1978년 콘클라베
1978년 8월 교황 바오로6세가 선종하면서 열린 콘클라베에서 총111명의 추치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되어 단 이틀만에 4회의 투표를 거쳐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이름을 명명할 때 두명의 전임 교황 요한23세와 바오로6세를 기리기 위해 요한 바오로1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여 즉위하게 된다. 여담으로 대한민국 서울대교구 김수환(1922~2009, 추기경1969~2009)추기경 역시 이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콘클라베에 참석한 인물로 남게 된다.
교황
교황으로 즉위한 뒤 두명의 전임 교황 요한23세와 바오로6세의 의지를 이어받아 카톨릭 교회를 스스로 개혁시켜 당시 시점으로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교황 스스로가이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인 석상에서 수시로 밝히기도 했다.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교황의 예우를 최소한으로 줄이고(대관식을 포기한 최초의 교황), 의식자체의 화려함을 대폭 축소하였고 더욱이 '짐'이라 부르지 않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 된다.
선종
그러나 재위한지 25일만인 1978년 9월 29일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이전부터 건강이 지속적으로 나빠져오다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선종했다는 것이 교황청의 발표내용이다. 요한 바오로1세 사후 39년이 지난 2017년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 PP., 1936~2025, 재위2013~2025)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