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바오로6세

Mintaka5 2025. 4. 2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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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반니 바티스타 엔리코 안토니오 마리아 몬티니(Giovanni Battista Enrico Antonio Maria Montini)

262대 교황 바오로6세(Paulus PP. VI, 1897~1978, 재위1963~1978)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61대 교황 262대 교황 263대 교황
출신 이탈리아 왕국, 소토일몬테 이탈리아, 콘체시오 이탈리아, 카날레다고르도
명칭 요한23세
Ioannes PP. XIII
바오로6세
Paulus PP. VI
요한 바오로1세
Ioannes Paulus PP. I
생몰년도 1881.11.25 ~ 1963.06.03 1897.09.26 ~ 1978.08.06 1912.10.17 ~ 1978.09.28
콘클라베기간 4일
(1958.10.25~1958.10.28)
3일
(1963.06.19~1963.06.21)
2일
(1978.08.25~1978.08.26)
재위 1958.10.28 ~ 1963.06.03 1963.06.21 ~ 1978.08.06 1978.08.26 ~ 1978.09.28

바오로6세
바오로6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97년 이탈리아 왕국 콘체시오(Concesio)에서 아버지 조르조 몬티니(Giorgio Montini, 1860~1943)와 어머니(Giuditta Alghisi, 1874~1943)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배경

아버지 조르조 몬티니는 변호사와 국회의원등의 직업을 가진 부르주아였다. 조반니 바티스타는 태어난지 4일이 되던 1897년 9월 30일 유아세례를 받는데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던 조반니는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신학교에 1916년 입학한다. 1920년 브레시아 대성당 지아친토 가지아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로 이주해 교황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민법, 교회법, 철학등을 공부하며 외교까지 공부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교황청에 1922년 들어가 국무원에서 일하면서 눈에 띄어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재위1922~1939)의 명으로 교황 대사로서 폴란드 바르샤바에 파견되는 외관직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939년 교황 비오11세가 심장마비로 선종하면서 비오12세(Pius PP. XII, 1876~1958, 재위1939~1958)가 교황으로 선출된지 6개월만에 2차세계대전(1939.09.01~1945.09.02)이 발발하면서 교황청은 전쟁을 규탄하며 피해를 보는 약자들을 위해 바티칸 내에서 민간인, 군인, 전쟁포로 할 것없이 직접적인 활동을 하며 비밀리에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 재임1933~1945)와 접촉하여   전쟁상황을 주시하면서 희생자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구해낸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은 다양한 직책들을 맡아 난민, 유대인등에게 지원을 하는 업무를 한다. 1954년 대주교에 승품되고 1958년 비오12세를 이어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한 요한23세(Ioannes PP. XXIII, 1881~1963, 재위1958~1963)가 즉위하고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요한23세의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는 일원으로서 많은 일을 하는데, 1963년 요한23세가 선종하고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6세로 명명된다. 즉위이후 예식을 개혁하고, 전임 교황 요한23세의 선종으로 중단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재개해 마친 뒤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바오로6세의 가장 큰 변화는 향후 콘클라베에서 만80세 미만의 추기경들에게만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을 부여하고, 75세가 되면 자유의사에 따라 사의를 표명할 수 있도록 권고하는등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관례를 만든다. 1978년 81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선종한다. 

 

초년

부르주아 가문이였던 몬티니 가에서 태어나 어릴적 몸이 좋지 았았던 탓에 예수회에서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에 입학해 교육을 받고 1916년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 1920년 브레시아 대성당 지아친토 가지아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받고 로마로 가서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민법, 교회법등을 공부하며 1922년 교황청 국무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다. 당시 교황 비오11세(Pius PP. XI, 1857~1939, 재위1922~1939)의 명으로 1923년 폴란드 주재 교황 대사로 외관직 파견을 가게 된다. 폴란드에서 수개월간의 대사 임무를 맡고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왔을 때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파시스트당이 창당된 후 이탈리아에서 득세하고 있던 시점이였다. 몬티니는 파시스트의 극성향을 경계하여 진실되게 이들에 맞서 이기려면 더욱 교회가 단결하고 믿어야한다고 생각하여 학생들과 자주 만나 강론을 펼치고 미사를 집전하고 영적인 도움을 주는등 반 파시스트 성직자로서 유명해진다.  

 

비오12세와 2차대전

당시 추기경중 으뜸에 가깝던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비오12세)은 몬티니의 능력을 보고 교황청 내 학술원에 일을 보게 하는등 신임하고 있었는데 1939년 비오11세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12세로 즉위함에 따라 몬티니는 매일 교황을 만나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여 더욱 신임해 중책을 맡기는데, 비오12세가 즉위한지 6개월도 채 되지않은 시점인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몬티니는 이미 교황청 외교관중 제일 중요한 임무를 맡고있는 성직자로서 동시에 비오12세의 개인 비서로서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매일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기도편지, 도움편지등을 작성해 보내는 임무를 맡는다. 6년간의 긴 2차대전동안 전쟁포로, 민간인, 난민등을 구제하고 돕기위한 바티칸 정보 기관을 설립한 장본인이며 이러한 행보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여러 공격을 받는등 위기도 겪지만 비오12세를 포함한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보호하여 살아남게 된다. 교황 비오12세와 함께 전쟁동안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을 수많이 구출한 장본인이다. 전쟁이 끝난 뒤 비오12세의 총애로 1954년 대주교 서품을 받고, 밀라노의 대주교가 된다. 

 

요한23세

 1958년 비오12세(Pius PP. XII, 1876~1958, 재위1939~1958)가 선종함에 따라 콘클라베가 열리는데, 사람들은 비오12세의 최측근 성직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대주교가 교황후보자에 오를거라 내다봤지만, 이 때 몬티니는 대주교 신분으로서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조차 못하는 입장이여서,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23세(Ioannes PP. XXIII, 1881~1963, 재위1958~1963)로 명명되어 즉위한다. 요한23세는 즉위 직후 바로 몬티니를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하게 된다. 요한23세는 이미 즉위당시 77세의 고령으로 재위기간이 짧을거라 예상하고 크게 일을 저지르지 않을거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요한23세는 추기경들의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어 공의회(세계 모든 성직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겠다는 발표를 함과 동시에 큰 파장이 인다. 물론 몬티니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체 기획 총괄을 맡은 추기경으로서 이러한 엄청난 소동에 놀라고 그만큼 많은 업무에 피곤해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창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고 있던 도중인 1963년에 요한23세가 갑자기 선종해버리면서 공의회가 중단되어버린다.  

 

1963년 콘클라베

요한23세가 선종하고 콘클라베가 열리는데 총2일간 82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투표를 거듭한다. 이틀동안의 투표 끝에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6세로 명명되어 즉위하게 된다. 

 

교황

 바오로6세는 1922년부터 이미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교황청에서 업무를 본 베타랑중 베테랑이였기에 바티칸내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꿰뚫어볼 정도였는데, 그만큼 수많은 문제점과 좋지않은 관행, 불이익, 부정적 요소등이 눈에 보여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수많은 개혁을단행하기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교황에게 주어지는 의례자체를 대폭 축소하고 요한23세 선종으로 중단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재개하여 교회전체를 개혁함과 동시에 교황청의 기구 간소화, 탕평인사(비 이탈리아계 인사등용), 전례 수정, 기독교 종파들까지 교회 일치를 위해 화합을 한 장본인이다. 최초로 영국 성공회 지도자인 100대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1904~1988, 대주교1961~1974)를 공식적으로 만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할 만큼 화합을 중요시했던 인물이다.  

 

선종

1978년 급격하게 나빠진 건강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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