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1753~1786)
출생
1753년(영조29년) 조선에서 아버지 성윤우(1709~1769)와 어머니 정경부인 부안 임씨(1722~1756)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휘는 '덕임'이다.
배경
조선22대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의 후궁으로 문효세자 이양(1782~1786)의 어머니이다. 1760년대 초반에 궁에 궁녀로 입궐하는데는 배경이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궁녀로 입궐하는 과정은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입궐하기 전부터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입궁하게 되었다는 승정원일기 기록은 남아있다. 거기다 1773년(영조49년) 궁녀 덕임을 포함한 공주등과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는데 같이 필사했던 인물들은 아래 표와 같다.
생몰년도 | 비고 | |
청선공주 | 1756 ~ 1802 | 사도세자의 차녀 |
청연공주 | 1754 ~ 1821 | 사도세자의 장녀 |
궁녀 덕임(미래의 의빈 성씨) | 1753 ~ 1786 | 정조의 후궁 |
궁녀 경희 | 기록없음 | 혜경궁 홍씨 처소 궁녀로 추정 |
궁녀 영희 | ||
궁녀 복연 |
1766년(영조42년), 1779년(정조3년), 1780년(정조4년) 3차례에 걸쳐 정조가 내린 승은을 사양(당시 중전 효의왕후 김씨가 자녀가 없는데 자신이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하였고, 2차시기인 1780년에도 역시 정조의 뜻을 거절했다가 정조가 덕임(의빈 성씨)의 하인들에게 벌을 내리게 되면서 결국 후궁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후궁이 된지 2년후인 문효세자(1782~1786)가 태어나면서 정5품 상의에서 정3품 소용이 되고, 1783년(정조7년)원자가 되면서 정3폼 소용에서 정1품 빈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1786년(정조10년)문효세자가 급사하고 임신중이였던 의빈 성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서거하고 만다.
초년
아버지 성윤우(1709~1769)가 홍봉한(1713~1778)의 청지기(집사)로서 이미 홍봉한의 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눈에 들어있어서 궁녀로 입궐하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입궐할 때 쯤에 임오화변이 일어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1735~1762)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왕세손 이산(미래의 정조)는 이 화변으로 어머니 세자빈 홍씨(혜경궁)와 세손비 김씨(미래의 효의왕후)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홍봉한의 거처에 있던 상태였다. 이 때 덕임은 홍봉한의집에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가로 내쳐진지 10일정도 지났을 때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가 이들을 다시 불러 궁으로 돌아가고 세자빈 홍씨는 이미 아버지 사가에서 눈여겨본 덕임을 궁녀(나인)로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세자빈 홍씨는 덕임의 겸손한 모습과 검소함, 부지런함등을 이미 목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궁 생활
I. 세손(정조)의 1차 고백 : 차임
왕세손 이산(미래의 정조)은 이미 외할아버지의 사가에서 덕임을 지켜봤었는데 이미 세손은 단아하고 고귀하면서 차분하기까지 했던 덕임의 모습을 보며 호감을 느끼고있었는데, 그렇게 콩깍지가 씌인 세손은 1766년(영조42년) 덕임을 따로 불러내어 고백하여 승은(후궁이 되기위한 절차) 상궁이 되는 것을 제안하지만, 덕임은 이를 거절한다. 이는 장차 덕임에게는 불경죄로 처벌을 받을수도있는 상황이였는데, 거절한 이유를 말하자면 당시 세손의 아내였던 세손빈(미래의 효의왕후, 1754~1821)에게 아이가 없어 승은을 받고 후궁이되면 윗전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세손은 이러한 덕임의 마음에 더욱 감동하여 마음이 더 푹 빠지게 된다.
II. 정조의 2차 고백 : 과인은 그래도 너를 잊지 못한다
이후 1776년 조선 21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가 승하하고 세손 이산이 조선 22대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로 즉위한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효의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어서 조정 대신들은 우려를 표했는데, 1778년(정조2년)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승정원 도승지(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장) 홍국영(1748~1781)의 여동생 원빈 홍씨(1766~1779)를 간택하여 후궁으로 책봉하지만 원빈 홍씨는 후궁이 된지 1년만인 1779년(정조3년) 불과 13세의 나이로 승하해버린다. 그러나 어린 여동생을 효의왕후가 독살했다고 믿은 홍국영은 중전을 모함하여 마음대로 실권을 휘두르다가 정조의 분노를 사버려 실각한다. 원빈 홍씨마저 승하해버리고 정조는 다시 덕임에게로 시선이 가는데, 여지껏 궁에 들어와서 사건사고도 일으킨 적 없이 조용히 위치를 지킨 덕임에게 한번 더 고백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덕임은 승은받기를 거절하게 되는데 이는 효의왕후에게 여전히 자식이 없음을 의식하고 이를 도리라 생각하여 거부한 것이라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그렇게 2번 차인 정조는 후궁으로 화빈 윤씨(1765~1824)를 간택한다.
III. 정조의 3차 고백 : 이번에도 거부하면 혼난다
그러나 화빈 윤씨는 정조사이에서 임신한 후 출산 전 산실청()이 설치될 예정이였는데, 산실청이설치된 후 30개월간 아이를 출산한 기록이 없다. 사실상 이는 상상임신이라는 사건으로 왕실로부터 신임을 잃었는데, 화빈 윤씨는 게다가 시기 질투까지 심한 성격으로 정조의 사랑을 얻지 못하여 정조는 다시 덕임에게로 향한다. 3번째 고백이였는데 덕임은 여전히 거절할 마음이였지만 정조는 이번엔 남자답게(?) 물러서지 않고 덕임의 하인들에게 벌을 내리면서 압박을 가하여 나랑 혼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버리면서 이에 덕임도 거부하지 못하고 그제서야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효세자 이양
그렇게 덕임과의 관계가 공론화되면서 덕임은 승은을 입게되는데, 이미 정조의 아이를 임신해있던 덕임은 후궁이 되어 1년도 안되는 시간에 승은상궁(정5품 제조상궁보다 위인 품계임)에서 1782년 아들 문효세자(1782~1786)를 낳고 정1품 빈에 봉해지게 되면서 의빈 성씨로 불려지게된다. 그렇게 아들을 출산하여 왕실에 기여하고 빠른시간 내에 높은 품계에 오른 의빈 성씨는 높은 직위에도 위로는 중전이였던 효의왕후(1754~1821)를 극진히 모시고 예의를 다하고 효의왕후역시 의빈 성씨의 이러한 겸손한 행동가짐과 차분한 성격에 의빈 성씨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비극
그러나, 의빈 성씨에게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데, 1786년(정조10년) 4세에 불과했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사망해버린 것이다. 더욱이 의빈 성씨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상태인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몸이망가져버려 원인모를 병에 걸리고 만다. 그렇게 아들 문효세자가 사망한지 2개월만인 1786년 9월 승하해버린다. 그렇게 정조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모두 잃고만다.
효창공원
의빈 성씨는 아들 문효세자가 사망한 뒤 자신도 병석에서 병마와 씨름할 때, 정조에게 아들 문효세자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게 되면서 이에 정조는 문효세자 묘 옆에 의빈 성씨의 묘를 함께 두게 된다. 사실상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라 조정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치게 되지만, 정조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의빈 성씨의 유언을 들어주게 된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가 묻혀있는 묘소를 효창원이라 하고 이는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효창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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