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의병

의병장 김덕령

Mintaka5 2025. 3. 22. 14:50
반응형

김덕령, 1568~1596

김덕령 삽화,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568년 조선 전라도 광주군 광주읍에서 아버지 김붕섭(?~1581)과 어머니 남평 반씨(?~1593)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임진왜란(1592~1598)당시 의병으로 활동한 의병장이자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로부터 정6품 형조좌랑을 재수받고, 이후로도 여러 군호를 받지만, 1595년(선조28년)명나라와 왜국간의 협상으로 인한 전쟁 소강상태때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러 출발하였다가 난이 끝나고 돌아올 때 이몽학과 서로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체포되어 선조로부터 직접 국문을 받고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매일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는 인물이다. 김덕령은 사후65년이 지난 1661년(현종2년)에야 신원이 복구되고 1788년(정조12년)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에 의해 증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초년

광산 김씨 집성촌인 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근처에서 살아온 김덕령은 서인이였던 우계 성혼(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을 배움과 동시에 근처에 있는 무등산에서 말타기, 검술등 무예도 고루 익혀 문, 무를 모두 배운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김덕령이 21세가 되었던 해 1589년(선조22년), 서인과 동인간의 정치다툼이 정여립의 난으로 더욱 거세게 번지게 되는데 이때 위관으로서 정여립의 난을 기축옥사로 발전시켜 1천여명의 동인을 숙청하게끔 하는 서인 정철(1536~1594)이 혹독하게 동인들을 다뤘다. 

 

의병 활동

 I. 임진왜란

기축옥사가 마무리되고 조정이 나름 안정을 찾을즈음인 1592년(선조25년), 왜군이 20만 대병을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데이것이 임진왜란(1592~1598)이다. 부산포에 상륙하고 이틀만에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해버린 왜1군 선봉부대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 방향으로 진격하게 된다. 김덕령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물론 무(검술, 기마술)를 익혔지만 학자에 가까운 타입이였지만 같이 의병활동을 했던 형 김덕홍이 왜군에 의해 전사하게 되고 1593년(선조26년) 어머니까지 사망하면서 분노가 치솟게 된다. 

 

II. 의병 첫활동

김덕령은 1592년 5월 임진왜란이 발발함에 따라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당시 광주에서 의병장으로서 아들 고종후(1554~1593), 고인후(1561~1592)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고경명(1533~1592)에게 찾아가 수하 의병으로 활동하는데, 1592년 8월에 벌어진 제1차 금산전투에서 형 김덕홍이 고경명과 함께 왜군과 맞서싸우다 모두 전사해버리고 만다. 거기다 1593년(선조26년) 어머니 반씨까지 사망하면서 김덕령은 상을 치르러 가게 된다. 

 

III. 거병

어머니의 상을 치르는와중에도 가족들이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하는 이 때 동생 김덕보()가 김덕령 대신에 삼년상을 치르겠다고 하면서 의병을 거병하기위한 결심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전라도 담양에서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키게 되면서그 병력이 1천여명에 달할정도로 거대해진다. 이미 진주성 전투(1차1592년, 2차1593년)를 통해 경상도, 전라도쪽의 병력에 공간이 생겨버리면서 정부 차원에서도 의병을 지원하는 정책을 많이 썼던 때였다. 그렇게 김덕령의 의병부대는 매형인 김응회(1555~1597)와 손위처남 이인경(?~?), 고종사촌 김언욱(1545~1596)등 가족들이 같이 나서서 거병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을 전라도에서 만나고 이곳에서 병사를 모으기 위한 과거시험장을 열은 광해군의 아래에서 직접 응시자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평가하는등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초승장이라는 군호까지 하사 받고 이후선조로부터 초승장군이란 군호까지 받게 된다.   

 

IV. 활약

조정에서 이들의 통솔문제와 군량조달 문제로 각각 흩어져있는 의병들을 통합해 충용군으로 합쳐 의병과 관군의 연합부대가 만들어짐과동시에 김덕령은 의병장이 되며 경상도 의령지역을 중심으로 규합한 의병장 곽재우(1552~1617)와 함께 도원수 권율(1537~1599)아래에서 임무를 맡게 된다. 1594년부터 1597년까지는 명나라와 왜국간에 강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게 되면서 우선적으로 규합한 의병들 중 수백의 병력만 남기고 귀농시킨 다음 둔전을 설치해 식량조달을 원할하게 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한 대비책을 꾸려나가게된다. 

 

V. 이몽학의 난과 죽음

 1596년(선조29년) 8월, 충청도 일대에서 이몽학(?~1596)이 농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은 순식간에 수천의 농민병을 규합해 홍주성(현 충남 홍성)으로 진격하면서 홍주 목사 홍가신()이 거짓 항복으로 이몽학을 속여 시간을 벌고자 하였고 이 시간동안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김덕령에게까지 연락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작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기위해 김덕령은 병력을 보내게 되는데, 그 마침 이몽학의 농민군은 홍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며 뿔뿔히 흩어지게되면서 난이 평정되는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몽학의 수하로 있던 한현()이 붙잡혀 국문을 당하는과정에서 김덕령을 포함한 의병장들이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서 소문에 오른 의병장들이 잡혀가게 되는데 아래 표에 정리해 두었다. 

    생몰년도
의병장 김덕령 1568 ~ 1596
홍계남 1563 ~ 1597
곽재우 1552 ~ 1617
최담령 1563 ~ 1596
고언백 ? ~ 1609

이몽학(?~1596)이 처음에 농민들을 선동해 군사를 일으킬 때, 의병장 김덕령이 호응할 것이라고 거짓 선동하는 바람에 다른 의병장들은 풀려나지만 김덕령은 국문 과정에서 고문후유증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사망해버린다.  

반응형

'임진왜란 당시 의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병장 곽재우  (0) 2025.03.28
의병장 최경회  (0) 2025.03.27
의병장 임계영  (0) 2025.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