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의병

의병장 곽재우

Mintaka5 2025. 3. 2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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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1552~1617

 

 

출생

1552년(명종7년) 조선 경상도 의령군(현재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아버지 곽월(1518~1586)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임진왜란(1592~1598)당시 의병장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게 맞서 정암진 전투, 제1차 진주성 전투, 화왕산성 전투 등에서 맹활약한 인물이다. 본래 문과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만33세때 과거에 합격하지만 당시 답안으로 제출했던 글이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눈에 거슬려 합격무효가 되어버려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고향에서 은거할 결심을 하고 의령으로 내려간다. 이후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관군들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여 수도 한양까지 위태로워지면서 고향 의령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과거 낙방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1518~1586)은 경상도 의령 일대에서 용연정을 짓고 살고있다가 부인 진주 강씨 사이에서 1552년 곽재우를 낳게 되는데, 곽재우는 16세 무렵인 1570년(선조3년) 남명 조식(1501~1572)의 외손녀와 결혼하게 되면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과 동시에 조식으로부터 학문, 무예등을 배운다. 이후 진사시에 응시하지만 합격하지 못하고, 만33세가 되던 해인 1585년(선조18년)별시 문과 2등으로 합격하지만 과거시험 볼 때 쓰던 답안지 글이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눈에 거슬려 합격이 취소되고 불합격 처리되어버린다. 이러한 결과에 곽재우는 정계진출을 포기하고 고향 의령으로 내려가 농사와 학문연구, 낚시등을 즐기며 은거하게 된다. 

 

임진왜란

I. 의병을 일으키다

그러나 평생 은거를 하려던 곽재우에게 1592년 5월(선조25년) 만40세가 되던 시점에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이틀만에 점령해버리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면서 관군들이 연전연패 당하고, 당대의 명장이였던 신립(1546~1592)이 탄금대에서 전멸해버리면서 선조가 북쪽으로 몽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렇게 곽재우는 축적했던 재산을 털어 고향인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II. 천강 홍의 장군

곽재우는 1592년 6월 1일(음력 4월 22일),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붉은 옷을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의병을 모집하여 그 세가 2천여명에 다달았다. 곽재우는 의병장이되어 의병을 이끌고 기습, 매복 작전을 시기적절하게 쓰면서 갑작스럽게 왜구들에게 들이닥치면서 공격해대니,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떠는 왜군들이 많았다고들 한다. 곽재우는 이런 작전으로 왜군의 계획이였던 호남지방의 곡창지대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차단하는데 일축하였다. 

 

III. 정암진 전투

1592년 7월, 곽재우는 50여명의 정예 의병을 이끌고 이들을 경상도 의령 정암진에서 매복을 시킨다. 왜6군 사령관 안코쿠지 에케이(1539~1600)가 이끄는 2천여명의 선봉대가 전라도 침공을 위해 정암진을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였다. 마침 안코쿠지 에케이는 정암진 인근으로 6군을 보내 진격시 늪지대에 빠지지 않게끔 푯말을 세우게 시킨다. 왜군이 도하지점 푯말을 세워둔 그날 밤 곽재우와 50여명의 의병들은 이들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발이 잘 빠지는 늪쪽으로 옮겼고, 이에 왜6군 안코쿠지의 선봉대는 그대로 늪에 빠지게 되면서 왜6군 병력은 매복해있던 곽재우의 의병들에게 기습 공격을 받고 대패한다. 이 전투의 패배로 왜군은 전라도 지역으로의 침투 작전을 포기한다. 

 

IV. 진주성 전투

곽재우는 의병들을 이끌고 호남을 공략하려고하는 왜군이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려고 3만의 병력이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진주성에 입성하기 위해 왜군의 배후에 위치하여 견제하면서 심리전으로 진주성을 지원하고 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질 때 후방에서 공격을 하는 등 주로 전면전 보다는 기습전을 펼친다. 이는 곽재우의 지휘관으로서의 공연한 인명 손실을 피하고자 최대한 기습전으로 화력을 주어 효율을 낼 수 있는 전투를 구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의 승리에 일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땐 진주성 구원에 나서라는 조정의 지시를 거부하였다. 한해전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 당시 왜군3만병력의 3배가 넘는 9만의 병력이 모두 끌어져모아져 중과부적이라 생각하여 진주성수비를 포기하는데, 이는 이미 조선 조정에서도 진주성을 포기하라고 했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기위해 남은 이들은 모두 패배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지로 들어와 왜군9만의 대병력을 향해 맞서 싸우나 6배가넘는 병력차이를 극복하기는 어려웠고 진주성에서 모두 전멸당하고 만다. 

  본관 생몰년도 비고 직위
최경회 해주 1532 ~ 1593 전사 경상우병사
황진 장수 1550 ~ 1593 충청병사
서예원 이천 1548 ~ 1593 진주목사
장윤 목천 1552 ~ 1593 사천현감
이종인 개성 1556 ~ 1593 김해부사
김준민 상산 ? ~ 1593 거제현령
정평구 동래 1566 ~ 1593 별군관
김천일 언양  1537 ~ 1593 의병장
강희보 진주 1560 ~ 1593
고종후 장흥 1554 ~ 1593 복수의병장
양산숙 제주 1561 ~ 1593 공조좌랑
이잠 철성 ? ~ 1593 적개의병장
오빈 함양 1547 ~ 1593 복수의병장
오유 동복 1544 ~ 1593
민여운 여흥 ? ~ 1593 의병장
황대중 장수 1551 ~ 1597 1597년 남원 전투에서 전사
성수경 창녕 ? ~ 1593 전사 진주판관

 

V. 이몽학의 난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여러 전투에서 승전을 거듭하고 왜군을 저지하는데 일축하여 관군으로 임명되어 목사, 조방장등에 이르지만 1594~1596까지 2년간 명나라와 왜국간의 강화 회담으로 일시 전투가 중지됨에 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게되지만, 충청도 출신 서얼 왕족 이몽학(?~1596)이 반란을 일으킨다. 문제는 이몽학이 관군에 의해 조사를 받고 고신을 당할 때 의병장들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소문이 확산되어 버리면서 일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에 의병장 김덕령(1568~1596), 홍계남(?~?), 곽재우(1552~1617), 최담령(1563~1596)등이 끌려가는데 곽재우와 홍계남은 무죄로 석방되지만 의병장 김덕령은 누명을 벗지 못하고 옥사하고 최담령은 처형되기에 이른다. 

 

VI. 정유재란과 산성전투

1597년(선조30년), 명나라와 왜국간의 강화가 결렬되면서 다시 왜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위험성이 커짐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 곽재우를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로 임명한다. 곽재우는 방어사로 임명되자마자 경상도 창녕에 화왕산성을 쌓게끔 하고 그의 본관인 현풍(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 석문산성을 쌓아 왜군들이 북진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렇게 1597년 8월 왜군이 다시 좌,우군으로 나뉘어(좌군 전라도, 우군 경상도를 통해 북상)조선에 다시 쳐들어오는데 곽재우는 완공된 화왕산성에서 의병, 승병들을 포함해 수천명의 병력으로 가토 기요마사(1562~1611)의 군대와 맞서게 된다.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화왕산성을 공략하지만 죽기로 맞서는 조선군에 의해 시간이 계속 지체됨에 따라 의문을 가졌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저 산성을 지키는 장수가 누구인가라고 했더니 곽재우라는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렸다고 한다. 그렇게 우군의 북진을 막은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진행중이던 때에 계모인 김해 허씨가 사망함에 따라 곽재우는 방어사 벼슬을 내려놓고 3년상에 들어가게 된다.

 

임진왜란 종료 이후

계모 김해 허씨의 3년상이 치뤄지는 도중 7년간의 긴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지만 사양하고 고향 의령으로 돌아간다. 여러차례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의 관직 제수에도 불구하고 사양해오다가 1599년(선조32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는 것을 승낙한다만 바로 이듬해 1600년 왜국과의 화친을 주장하다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다시 고향 의령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삼사에서 함부로 사직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재탄핵을 받아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형을 받는다. 2년뒤 유배형이 풀리고도 선조가 재차 출사를 요청하면서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37년) 찰리사가 되는데, 선조는 곽재우의 이러한 강직한 성품을 알고 곽재우가 이후 삼사에서 탄핵을 받아도 무시한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면서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이 즉위하면서 광해군이 곽제우에게 삼도수군통제사등을 제수하지만 병을 핑계로, 고령이라는 이유로 모두 사양하기에 이른다. 

 

사망

죽기전까지 모두 관직을 사양하는데, 계속 사양하다가 1617년(광해군9년) 이전에 자신이 만든 경상도 창녕 망우정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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