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청일전쟁

Mintaka5 2025. 3. 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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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1894~1895

 

 

 

배경

총7개월(1894. 07. 24 ~ 1895. 04. 17)간 일어난 동아시아의 전쟁으로,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 일제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동아시아에서 메이지유신(1868)이후 서양식으로 교체되어 급속도로 발전하던 일본제국은 1876년(고종12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를 진행하여 조선에 친일내각을 수립시키고 갑오개혁등으로 조선에 대한 보호화를 가속화시키려고 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1차 1840~1842, 2차 1856~1860)으로 인해 서양 열강들에게 패하여 국력이 점점 상실되고 있던 찰나에 이래선 안된다 싶어 자체적 재기를 위한 양무운동을 실시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시 잡고자했는데, 일제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급속도로 발전해 패권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두고 패권을 잡아 서구 열강들관의 교역 루트를 확보하겠다는 두 국가간에 충돌이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발발

I. 전조전

청나라와 일제는 서로 충돌이 될만한 전조전도 존재했는데, 이미 1884년(고종20년) 갑신정변이 벌어졌을 때 조선 경복궁에서 이미 청군과 일제군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는 조선의 정쟁으로 벌어진 충돌이라 큰 명분이 존재하지 않아 다툼정도로 끝나 양국간의 텐진조약으로 마무리되지만 그럼에도 군대는 빼지 않고 계속 대치하게끔 한다만, 10년뒤인 1894년(고종30년) 무력충돌 정도가 아닌 전쟁으로 보여지게 된다. 

청나라는 조선을 하나의 방파제정도로 보고, 일제는 조선을 통해 대륙을 넘어 서구열강들과의 교역루트를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충돌하면서 부딫히게 된다. 

 

II. 동학농민운동

1894년 초,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동학농민운동으로도 불리는 이 민란은 동학세력을 결집하여 세력을 확대하기에 이르는데 점차 그 세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까지 성장하게 되자 당황한 조선 정부에서 상국인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게 된다. 1885년(고종21년) 텐진조약으로 마무리된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제는 규약에 따라 조선에 군을 파병할 때는 통보를 하는 것이 필수과정이라 청나라는 군을 파병할때 일제에 통보하긴 했다. 

그러나 일제는 군대를 민란으로 인하여 자국 공사관과 거주민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 이로인해 청군과 일제군이 모두 조선에 집결하게 되면서 또다른 불씨가 지펴질 기미가 보이면서 조선 정부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게 동학농민군을 막으려고 파병했더니 오히려 두 양국간의 대립으로 조선이 전쟁터가 될 것 같은 상황에 바로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과 협상을 벌여 일단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한다. 그렇게 파병의 원인이 해소되면서 청나라 군대는 철수에 응하지만 일제군은 이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III. 전쟁의 시작

일제군은 1894년 7월 갑자기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세워버린다. 청군과의 직접적인 무력충돌은 없었지만 일제는 불법적으로 궁을 점령한 후 흥선대원군(1821~1898)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게끔 하고 일제와 친하다는 김홍집(1842~1896)을  내세워 김홍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삼아 친일내각을 형성하게 한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1894년 7월, 청나라 군대가 통하던 통로인 아산만 근해를 순찰하던 청나라 군함이 일제의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선장에 의해 습격당한다.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전투로 인하여 당황하던 청나라 군대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전투모드에 들어가고 일제군은 아산만에서 벌어진 전투의 서전에서 승리를 거머쥔 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행태를 보인다.

청나라 군대는 성환(현재 천안시 성환읍)에 수천의 주둔군이 있었는데, 일제군은 오시마 요시마사(1850~1926)여단장을 필두로 하여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다. 청군은 일제군에 밀려 점차 북쪽으로 밀려나 평양에까지 밀리게 된다. 이 때부터 사실상 병력이 증강되면서 전투에 투입된 병력규모 단위자체가 커지기 시작한다. 2달간 평양에 있던 청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일제군은 계속해서 증강되어 평양의 청군을 습격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청나라군이 항복을 하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도가 한층 더 높아진다. 

이후 압록강해전(1894.09.17), 여순 대학살(1894.11.21~1894.12.10), 웨이하이 전투(1895.01.20~1895.02.12), 동중국해 점령(1895.03.26)등을 통해 일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시모노세키 조약

청나라는 연일 패전을 거듭하면서 1895년 4월 17일, 일제에 회담을 요청하여 사실상 청일전쟁에 패배했음을 인정한다. 그 회담의 결과는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확인되었고 청나라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전쟁배상금 2억냥을 일제에 지불하고, 요동반도, 타이완(현 대만), 펑후제도등을 할양해주는등의 보상을 해주는 처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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