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정벌
배경
일명 청나라-러시아 차르국간 국경 분쟁이라고 불리는 나선정벌은 1652년(효종3년)부터 1658년(효종9년)사이 두 국가간 군사충돌을 뜻한다. 1658년 이후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기전까지 연해주 아무르강을 경계로 청나라와 러시아 차르국의 대립이 수차례 전투를 거친다. 당시 조선은 1654~1658년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조선군을 아무르강 일대로 보내 청나라 군대에 합류시켜 러시아 차르국 군사들과 충돌하게 된다.
처음 전투때 청나라 군대는 러시아 군대의 화력에 밀려 전투에서 수차례 패하자 청나라에서는 조선 포수를 요청하여 화력을 보충하려고 했고 이에 조선측에서는 수백명의 포수를 보내 청나라와 함께 러시아군과 맞서게 된다. 조선군의 규모는 적었지만 조총부대의 전과가 아주 컸어서 결국 승리를 거뭐지게 되고 당시 청나라 황제 순치제(1638~1661, 재위1643~1661)는 이에 전사, 부상한 조선군에게 상을 내리고 은을 하사하고 2차 나선정벌이 마무리된다.
파병병
1차(1654년)
조선은 1637년(인조14년) 벌어졌던 병자호란에서 패배를 맛본 후 청나라에 항복하고 신하국이 되는데, 조선의 양반들은 비굴하게 고개숙인 조선 정부에 대해 관직에 출사하지 않겠다는 뜻을 펼치고 산당을 형성한다. 인조(1595~1649, 재위1623~1649)이후 즉위한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은 정통성이 약했는데, 효종은 정통성을 세우고 산당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북벌론이라는 패를 꺼내들게 된다.
당시 명나라(1368~1644, 남명1644~1662)는 청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해 불씨가 거의 꺼지기 직전이였고 효종도 이를 지켜보면서 청나라에 대항하기보다는 내부적으로 결속할 개혁수단으로서 북벌론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와중에 1654년 청나라에서 나선정벌을 위해 조선군을 보내달라는 사신의 요청이 오게 된다.
효종은 이에 포수100여명(기타병참포함 150여명)을 파병하게 됨으로서 나선정벌에 참여하게 되는데, 1654년 파병은 1차 나선정벌에 해당한다. 이 때 파병된 조선군과 청나라 연합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되지만 러시아는 계속해서 전투지역이였던 흑룡강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세를 유지한다.
2차(1658년)
청나라 순치제(1638~1661, 재위1643~1661)는 4년뒤인 1658년(효종9년)다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조선은 신유(1610~1665)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차 파병의 2배규모인 200명의 조총수(기타병참포함270여명)를 보낸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면서 1차때 패배를 맛본 러시아군은 병력수와 화력차이에 밀리면서 전투의 우세를 보이지만 조-청 연합군도 10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오면서 적지않은 피해를 보았다. 이 전투 승리이후 며칠간 방어하면서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러시아군이 모두 흩어지면서 전투는 종료되고 조-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조선군은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나오면서 피해가 발생했고, 이들은 청 황제 순치제가 나선정벌을 통해 전사, 부상을 입은 조선군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자세하게 수치가 언급되어있다.
성과
효종은 1,2차 나선정벌 파병을 통해 청, 러의 군사력과 행정적 실태등을 파악하여 임진왜란(1592~1598)때 쓰던 조총을 업그레이드 하여 신식무장을 하고자 했지만, 1659년(효종10년)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면서 전력화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