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1144
출생
출생년도와 지역미상이며, 아버지 척위공(?~?)과 미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고려의 소드마스터이자 무반으로서 동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후로 윤관(1040~1111)의 눈에 띄어 윤관을 따라 다시 동여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워 지속적인 승진을 거듭해 인종(1109~1146, 재위1122~1144)대에 정2품에 해당하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제수되기까지 하지만, 1126년 이자겸(1050~1127)과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켜(이자겸의 난)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권세를 부리다가 김찬, 안보린등이 인종에게 이자겸, 척준경을 제거할 것을 계획안을 상주하고 인종이 동의함에 따라 이자겸, 척준경 일파들이 제거되고 척준경은 인종의 부름을 받아 인종이 척준경을 달래고 이후 정지상(?~1135)의 탄핵을받아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소드마스터 데뷔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지만 1070년대에 황해도 곡주(곡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서 자람으로서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도 못했고 관직진출도 한계가있어서 어린시절 방황을 일삼다가 1095년(숙종원년)이 되어서야 추밀원 별가에 오름으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I. 1차 여진정벌(1104)
그러다 1104년(숙종9년) 척준경에게 있어서 눈에 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전부터 여진족의 한 부족인 완안부와 고려간에 충돌이 격해지다가 전쟁이 벌어진 것이였다. 이 때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위기가 찾아오는데, 임간이 추밀원 관리인 척준경을 자신의 부관으로 삼아 출전시키게 된다. 척준경은 전투에서 적장을 베는 등 홀로 적의 기세를 꺾어버리는 효과를 거둠에 놀란 여진족이 후퇴함에 따라 모두가 놀람과 동시에 이 전투를 계기로 척준경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윤관은 이전의 패전의 원인을 정밀분석하고 기동력의 차이와 특수군의 부재라는 시각으로 판단해 별무반을 창설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II. 2차 여진정벌(1107~1109)
이후 숙종(1054~1105, 재위1095~1105)이 1105년 승하하고 예종(1079~1122, 재위1105~1122)이 즉위하고 1107년(예종2년)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전갈이 들어오면서 다시금 여진정벌이 단행되게 된다. 이 정벌에 17만명의 군대가 동원되고, 총사로 윤관()이 임명되고 척준경 또한 이 정벌에 녹사로서 참여하게 된다. 이 때도 척준경의 무예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다. 척준경은 석성 전투, 가한목 전투, 영주성 전투, 공험진 전투, 웅주성 전투, 길주 전투등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면서 승전보를 가지기도 패전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지속적으로 전선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 동북9성(동북에 쌓은 9개의 성)을 쌓고 공험진에 비를 세워서 경계를 삼고 방비하게 된다. 정확한 동북9성의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아 현재도 논란이 일고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연도 | 축성시기 | |
영주성 | 1107년(예종2년) | 12월 축성시작. 영주성이 가장 먼저 축성 |
웅주성 | ||
복주성 | ||
길주성 | ||
함주성 | 1108년(예종3년) | 2월 축성시작 |
공험진성 | ||
의주성 | 3월 축성시작, 방어막 구축 | |
통태진성 | ||
평융진성 |
전쟁이 장기전으로 감에 따라 예산문제와 여진족 내에서도 더욱 거세게 반격함에 따라 화친주장이 나오게 되면서 1109년 공식적으로 철수하게 된다. 척준경은 이 전쟁으로 수많은 공을 세워 5~6품에 해당하는 행영병마판관에 임명된다. 1122년 인종(1109~1146, 재위1122~1146)이 즉위하게 되면서 종3품 위위경, 직문하성등으로 오르고 1123년(인종1년)엔 정승의 반열인 정2품 참지정사와 이부상서(정3품)을 겸하고 1124년(인종2년)엔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른다.
이자겸의 난
I. 인종의 외할아버지
그러나 인종이 1122년 즉위함에 동시에 이자겸이 인종의 외조부(이자겸의 딸 순덕왕후 이씨가 인종의 어머니)로서 외척세력이 됨으로서 척준경이 이자겸을 도와(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으나 척준경의 딸이 이자겸의 아들과 혼인해 사돈관계가 된 것에 초점)같은 파가 된다. 이들 가족, 인척들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전횡을 일삼게 되면서 군주로서 용납하기 힘든 상태까지 온 인종은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신하를 통해 관철시키고자 했다.
II. 인종의 계획
1126년 인종은 종2품 동지추밀원사 지녹연(1069~1126)에게 이자겸, 척준경일파를 없애달라고 부탁하게 되면서 내시 김찬(?~1135), 안보린(?~1126), 상장군 최탁(?~1126), 오탁(?~1126), 대장군 권수(?~1126), 고석(?~1126)등에게 이자겸과 척준경 제거를 논한다. 이에 궁을 장악해 봉쇄한다음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1071~1126)과 아들 척순(1088~1126), 김정분(?~1126), 전기상(?~1126), 최영(고려말기 최영 아님, ?~1126)등이 제거되지만 몇몇이 성벽을 타고 탈출해 이자겸에게 보고해버린다.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에게 직접 출정을 명해 병사들을 이끌고 궁 안으로 들어가는데 척준경이 아들과 동생의 주검을 발견하고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인종을 마주함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인종이 당황해 척준경을 달래려고 재물을 하사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공격과 더불어 화공까지 감행한다.
III. 분열
이후 화공, 인종의 측근세력들이 척준경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사실상 인종도 힘을 잃어 이자겸은 자신의 사택에 인종의 거처를 옮기게끔 지시하면서 사실상 친위쿠데타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자겸은 왕이 된 것 마냥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자 사실상 이자겸의 사택에 연금되어있던 인종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내의원 최사전(1067~1139)과 모의하여 이간질시키게 한다. 안그래도 화공으로 궁에 불을 질렀다는 비난을 받은 척준경이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3남)이 직접적으로 비난함에 따라 인종이 이 때를 틈타 척준경에게 조서를 보내 계속 이간책을 쓴 효과로 점점 이들사이는 멀어져 척준경이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올리게 되면서 1126년 중순 척준경은 궁으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하게 된다. 이후 손쉽게 이자겸의 군대는 척준경의 존재만으로도 위세가 눌려 제압되어 부하를 시켜 이자겸을 잡아오도록 지시해 결국 이 난은 이자겸의 실패로 끝난다. 이자겸은 이후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령이 떨어지고 배소지에서 사망한다.
난 이후
인종은 척준경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수많은 직위를 하사하여 다시 회복이 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했다는 공을 통해 위세를 부리는게 꺼려졌던 인종은 정언 정지상(?~1135)이 이자겸의 난때 참여한 죄목으로 탄핵해 유배형이 떨어진다. 1128년(인종6년)그래도 이자겸을 제거했었던 공을 참작해 유배형에서 귀양을 시켜 척준경의 고향인 황해도 곡주(곡산)로 옮겨 2년뒤엔 가족들과 함께 살도록 혜택을 부여한다. 이후 1144년(인종22년)등창으로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