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1926)
1926년 6월 10일,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대한제국2대황제 순종(1874~1926, 재위1907~1910)의 장례식이 있던 날 조선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배경
1919년 기미년 3.1운동으로 인해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조선, 해외(상해 임시정부 등)에서 행해오던 독립운동이 서구열강들의 소극적 태도와 일제의 교묘한 술책으로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조선인들이 실의 속에서 힘겹게 살고있던 도중,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 창덕궁 이왕으로 물러나있던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6일 심장마비로 승하한다. 순종 황제의 승하는 국가를 잃은 전 조선인들의 민족적 설움을 대변해주는 격으로 세상을 떠난 황제의 장례식에서 추모함과 동시에 이들은 만세운동을 펼치게 된다.
3.1운동당시의 배경과 유사
일제는 1907년 고종을 강제로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다음 태제(황제의 동생인 계승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순종의 3살아래 이복동생 의친왕 이강(1877~1955)이 반일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패스하고 영친왕 이은(사실상 일제의 볼모나 다름없음, 1897~1970)을 의민태자로 책봉케끔 한다. 이들은 1919년 태상황제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승하로 3.1운동이 터져 국제적인 여론의 뭇매를 맞아본 경험으로 1926년 순종 황제의 승하에도 또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조선인들의 불순한 행동을 감시, 일본군 수천여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해군 함대까지 부산항, 인천항에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는 철저한 경계대비태세를 갖춘다. 이에 일제는 4월26일 많은 조선인들이 경성으로 몰려들어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우려해 강제로 조선인들을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날에 맞춰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을 하기로 다시 결의하기에 이른다.
전개과정
I. 세 도화선
1919년 3.1운동때처럼 천도교와 이번엔 조선공산당의 주도하에 6.10투쟁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저날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맞춰 학생, 시민할것없이 전국에서 모두 결집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한다. 위와같이 일제의 대비속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세갈래로 나눠 도화선을 터뜨리고자 한다. 첫번째 도화선은 사회주의자 권오설(1897~1930)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당수 강달영등을 필두로 한 노총, 인쇄조합원들의 만세운동계획인데, 이 때 하필 중국의 화폐를 위조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제 경찰이 인쇄소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이 계획이 발각되어버려서 권오설을 포함한 핵심인물들이 체포되면서 도화선이 터지지 않게 된다. 두번째 도화선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명이 야유회를 가던중 순종 황제의 승하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해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들은 6월10일 만세시위를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결의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전신) 2학년 박하균(1905~1953)의 하숙집에 모여서 진행하게 된다. 수만장의 격문, 전단을 작성하고 준비한다. 작성된 격문은 인쇄기계를 빌려 인쇄를 한 다음 각각 본인들의 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세번째 도화선은 중등학교 중심의 통동계로서, 경성 내 사립고보학생을 중심으로 순종 승하소식을 듣고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 이들도 수천매의 격문을 인쇄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6월10일이 되기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II. 6월10일 순종의 장례식날
1926년 6월10일 순종의 장례식에 참가한 2만5천에 달하는 학생들은 순종의 상여가 단성사(종로3가)에 다달았을 때인 오전 8시 30분경, 약관22세의 이선호(1904~1950)의 "대한독립만세"선창으로 중앙고보 학생 3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인쇄된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가 시작된다. 이를 시작으로 경성 내 각 위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리고 시위가 점차 확대되며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시위가 확대되지만 3.1운동이후 약화된 기존 민족진영의 조직력 약화와 유대관계 결여로 인해 결집이 느슨해져버리면서 일제 경찰에의해 저지당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III. 의의
일제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고 수백여명의 학생과 시민을 체포하면서 철저하게 탄압을 해버림에 지방으로 퍼져나가지 못해 전국급의 큰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이후 일어나게 될 항일운동의 소중한 불씨가 되는 역할을 한 운동으로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