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러일전쟁

Mintaka5 2024. 11. 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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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1904~1905)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과의 전쟁. 1년6개월정도 지속되었고, 두 제국이 대한제국의 주도권을 가지고 부딫힌 전쟁으로서 결국엔 일본 제국이 승리하면서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의 완전한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어버린다.

 

배경

I. 관계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러시아는 청나라를 거치지 않고 조선과 독자적으로 수교를 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팽창주의가 만연했던 유럽에서 러시아는 서진을 할 수 없었기에(유럽열강들이 서쪽에..)점점 남진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프가니스탄, 인도근방까지 남하하면서 자주 충돌하게 되는데, 러시아와 조선의 수교를 러시아의 남하라고 생각한 대영제국은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이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신흥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가 일제를 견제하고자 프랑스, 독일등의 열강들과 함께 합세해 일제에 압박을 넣어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제가 취했던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되돌려준다(3국 간섭). 

이런 러시아의 태도에 일제는 상당히 유감을 표했고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대립하게 된다.

 

II. 도쿄의정서

1896년 중엽,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간에 비밀로 체겨뢴 조약인 러-청밀약(모스크바 의정서)을 통해 조약 이후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해역을 이동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는 부동항이 없어 부동항 확보를 위해 철도를 놓기 시작해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를 점령한다. 거기다가 조선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아관파천(1896~1897)으로 정치적으로 우위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일제는 동시에 대한제국으로부터 경부선 부설권을 가짐으로서 교통망을 장악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제국간에 마찰이 불가피한 상황이였는데, 이에 두 국가는 1898년 4월 협상을 벌여 두 국가의 상호 동의 없이 대한제국에서 군사, 재정고문 추천금지, 독립인정, 내정간섭 배제 책임까지를 내용으로 한 3개의조항을 통해 합의를 도출한다. 이것이 도쿄의정서이다.

  도쿄의정서 3조항
I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정부는 최종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며, 대한제국의 국내 문제에 대해서 모든 직접적인 간섭을 상호 자제한다.
II 앞으로 완전히 오해의 초래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이 두 국가에 조언과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임명에 대해서는 상호간 사전 동의 없이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에 관한 상호 의무를 갖는다.
III 대한제국에서 일본 제국의 무역과 산업의 확장, 대한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다수임을 고려해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 제국과 대한제국 사이의 무역 관계 및 산업 관계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도쿄의정서를 통해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우위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III. 영일 동맹

일본 제국은 줄곧 자신들을 견제하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더욱 우위를 점하고 청일전쟁이후 3국간섭으로 랴오듕 반도를 내줬던 기억들을 토대로, 열강의 인정을 바고자 당시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동맹의 핵심은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대영제국이 일본 제국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라는 내용. 

이 동맹은 1902년 1월 30일 대영제국 런던 랜즈다운 후작 저택에서 체결되었는데,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영국 외무장관(1845~1927)과 하야시 다다스(1850~1913) 영국 주재 일본 공사가 서로 서명을 하면서 형성. 이를 1차 영일 동맹이라고 한다. 

 

러일전쟁 진행

I. 기습

일제는 1904년 2월4일 부터 러시아 제국과의 협상중지를 선언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러시아도 이에 질세라 청나라 여순항을 기지로 삼아 함대를 준비시키는데, 이 때 일본 제국의 함대 수장은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제독.

2월8일 일제가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에 정박해있던 러시아 함대에 어뢰를 쏴서 기습공격을 가한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를 러일전쟁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 전함 2척이 대파되고 전투가 벌어지지만 여순항에 해안선에 설치된 방어용 포대로 보호받는 러시아 함대를 충분히 공격할 수 없었는데 이 전투를틈타 일제 부사령관 우류 소토치키(1857~1937)는 제물포로 급히 방향을 돌려 5만여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상륙시켜 대한제국 수도 한양과 궁을 점령하고 주둔해버리고 점령3일 후 러시아 공사가 본국으로 철수함으로 따라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기에 이른다.

 

II. 여순항 해전

일제는 선제공격을 2월8일에 해놓고 2월1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시아 제국은 일제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걸 믿지 않다가 6일 뒤 2월 16일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다. 2월18일부터 일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여순항을 봉쇄시키기 위해 시멘트를 가득 실은 낡은 함선 5척을 여순만 입구쪽에 침몰시켜 봉쇄하려는 작전을 펼치지만, 제대로 침몰도 되지않고 새벽의 혼란속에서 제대로 침몰되지 않아 작전이 실패한다.  이것이 1차 봉쇄작전.

2차 봉쇄작전은 한달정도 지난 3월 27일 새벽에 진행되는데, 역시 1차 봉쇄작전때처럼 시멘트를 실은 선박 4척 을 투입하지만 또 러시아 군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버리고 일제측의 피해로 전투가 끝.그리고 또 한달가량이 지난 5월 2일 밤,  이번엔 12척의 봉쇄 선박을 투입하지만 기상상황 악하로 작전 중단을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8척은 복귀하지 않고 그대로 작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해안포대에 의해 이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된다. 일제 해군은 작전 실패로 인해 육군에게 여순항을 공략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후 여순항은 긴 공방전으로 이어진다.

 

III. 전투

제물포 해전, 여순항 해전, 압록강 전투, 진저우-남산전투, 히타치마루 사건, 모티엔 전투, 텔리수 전투, 대석교 전투, 시무청 전투, 203고지 전투, 서해 해전, 울산 해전, 코르사코프 해전, 요양 해전,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 쓰시마 해전

 

IV. 쓰시마 해전

일제측 화물, 여객을 담당하던 선박인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러시아의 조타관제를 지키지 않은(불빛을 노출) 러시아 발트함대의 병원선을 발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일제 해군 함대는 진해만(경남 진해)에서 출발해 발트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들을 에워싸 폭격을 가해 러시아 제국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러시아 제국 함대 피해 일제 함대 피해
함대 피해규모 격침16척(전함6척, 기타10척) 침몰 3척
자침 5척
나포 6척
중립국 도피 6척
자국항 도착 3척
인명 피해 규모 전사 4830명, 포로 6106명 전사 117명, 부상 583명

 

포츠머스 조약

사실상 이 전투로 러일전쟁이 끝나는 계기가 되는데, 일제역시 전쟁 지출이 너무 커짐에 따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odor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재임1901~1909)의 중재하에 러시아에서 강화 협정을 요구하고,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 포츠머스 시에서 회담이 이루어진다.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일본 제국에 사할린 남부를 할양하지만, 전쟁배상금은 일절 내지 않겠다라는 조건으로 시작한 협상이라 그나마 명목을 유지한다.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한 일본제국은 폭동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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