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건/조선

3.1운동

Mintaka5 2024. 11. 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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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1919)

기미년 1919년 3월 1일, 전국적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전개된 비폭력 독립 만세 운동으로서 전국적인 운동이 펼쳐져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게 한 역사적 사건이다.

 

배경

I. 발단

1916년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총독재임1910~1916)에서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 총독재임1916~1919)로 계승이 된다.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일본 천황에 대한 복종과 희생을강요받는 국민을 뜻함)으로 동화시켜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고자 학교를 설립하고, 일본군 헌병이 경찰의 역할을 겸임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창시함으로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불량선인을 단속, 집회와 단체운동을 일절 막고자 했다. 1918년 일본에 큰 흉년이 들면서 쌀가격이 폭등하는등 소동이 나면서 수습책으로 조선에서 나는 쌀을 일본 본토로 보내면서 쌀의 가격이 2년도 안되는 시기동안 3배넘게 폭등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조선인들의 생활고가 악화되는 상황이 초래된다.

 

II. 우드로 윌슨

이시기 1918년 1천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이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를 제안하면서 조선 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적 분위기가 연출된다.

 

III. 고종의 승하

이렇게 독립의 열망이 고조되던 1919년 1월 21일 태상황제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승하해버린다. 공식적으론 자연사했다고 하지만 독살설도 존재하고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와 같이 당시 석연치않은 죽음을 맞은 태상황제로 인해 민심이 격앙되면서 반일감정이 극대화된다. 조선총독부측에선 언론매체를 통해 고종의 독살설을 반박하는 기사를 내면서 조선인들의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확산된다.

 

3.1운동 전개과정

I. 무오 독립선언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만주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을 하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다.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의 주도하에 발표된 선언으로 1918년 12월에 발표된 것으로 생각되어 무오 독립선언이라 불리게 된다. 선언문에는 대한독립선언서로 명기되어 있다. 선언문이 작성되는 과정엔 조소앙(1887~1958)과 조용주(조소앙의 동생, 1889~1937)이 참여했고 석판으로 인쇄해 각국가에 전달된다. 

 

II. 2.8독립선언

1919년 2월8일 일본 제국 본토 도쿄에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이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생몰년도 비고
최팔용 1891 ~ 1922 와세다 대학교
송계백 1896 ~ 1920 와세다 대학교
백관수 1889 ~ 1961 메이지 대학교
김철수 1896 ~ 1977 게이오 대학교
이광수 1892 ~ 1950 와세다 대학교
최근우 ? ~ ? 동경상과 대학
김도연 1894 ~ 1967 게이오 대학교
윤창석 1889 ~ 1966 니혼 대학교
김상덕 1891 ~ 1956 와세다 대학교
이종근 1895 ~ 1975 니혼 대학교
서춘* 1894 ~ 1944 교토 대학교

*친일파로 변절

이들은 준비한 선언서를 들고 2월 8일 오후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면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이 때 이광수는 이전에 중국으로 떠난상태라 체포되지 않았고 10명은 체포 된다. 반강제로 해산되다시피 하고 2월 12일 다시 유학생100여명이 히비야공원(일본 도쿄 치요다구)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고자 했으나 강제 해산 된다.

 

III. 민족대표 33인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되면서 조선에서는 크게 분위기가 고무되고 이미 1월에 승하한 태상황제 고종(암살설)등으 조선내 계파, 종교, 좌우를 떠나 모두가 획일화된 독립만세운동을 하기위해 통합하게 된다. 천도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게 되는데, 최남선(1890~1957)이 초안을 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천도교측 인사 이종일(1858~1925)의 인쇄소 보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만세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으로 1919년 3월 1일 2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한다. 이들은 독립만세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우선시할 것을 결정한다.

  민족대표 33인 명단
1 손병희 1861 ~ 1922 12 이종훈 1856 ~ 1931 23 이필주 1869 ~ 1942
2 권동진 1861 ~ 1947 13 홍병기 1869 ~ 1949 24 김창준 1889 ~ 1959
3 오세창 1864 ~ 1953 14 이종일 1858 ~ 1925 25 신석구 1875 ~ 1950
4 임예환 1865 ~ 1949 15 최린** 1878 ~ 1958 26 박동완 1885 ~ 1941
5 나인협 1872 ~ 1951 16 한용운 1879 ~ 1944 27 신홍식 1872 ~ 1939
6 홍기조 1865 ~ 1938 17 백용성 1864 ~ 1940 28 양전백 1869 ~ 1933
7 박준승 1866 ~ 1927 18 이승훈 1864 ~ 1930 29 이명룡 1872 ~ 1956
8 양한묵(사망) 1862 ~ 1919 19 박희도** 1889 ~ 1952 30 길선주 1869 ~ 1935
9 권병덕 1867 ~ 1944 20 이갑성 1889 ~ 1981 31 유여대 1878 ~ 1937
10 김완규 1876 ~ 1950 21 오화영 1880 ~ 1960 32 김병조(망명중) 1877 ~ 1948
11 나용환 1864 ~ 1936 22 최성모 1874 ~ 1937 33 정춘수** 1873 ~ 1953

**변절자들

33인(양한묵과 김병조는 위와같은 이유로 빠짐)에 17명을 더합쳐 48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1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7인 명단
1 박인호 1855 ~ 1940 7 안세환 1892 ~ 1927 13 송진우 1890 ~ 1945
2 김홍규 1876 ~ 1959 8 함태영 1873 ~ 1964 14 현상윤 1893 ~ 1950
3 노헌용 1866 ~ ? 9 김원벽 1894 ~ 1928 15 최남선 1890 ~ 1957
4 이경섭 1874 ~ ? 10 김세환 1889 ~ 1945 16 강기덕 1886 ~ ?
5 김도태 1891 ~ 1956 11 임규 1867 ~ 1948 17 정노 1891 ~ 1965
6 김지환 1892 ~ 1972 12 한병익 1895 ~ ?      

 

IV. 3월1일

1919년 3월1일 2시 경성부 태화관에서 민족대표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진다. 이 때 노동자, 상인, 관리, 어린이, 거지, 기생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천회의 운동횟수, 참가인원은 수백만명이 넘는것으로 추산된다. 

  참가군 시위횟수 참가인원(추산) 사망자 수
경기도 22 288 65만 ~ 70만 1472
강원도 20 53 10만 ~ 11만 144
충청도 22 63 10만 ~ 13만 590
경상도 41 183 15만 ~ 18만 2470
전라도 32 83 30만 ~ 35만 384
황해도 17 137 9만 ~ 10만 238
함경도 25 119 5만 ~ 6만 135
평안도 33 189 50만 ~ 55만 2042
국외   51 5만 ~ 6만 34

1달여간의 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에서는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있는 유관순(1902~1920) 열사또한 충청도 천안 아우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해 체포되며, 체포된 사람들은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고문도중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나올정도로 혹독하게 다뤘다.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학교, 종교시설, 민가의 방화와 더불어 파괴까지 서슴치 않다가 수원 제암리에서는 일본군 중위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있다고 속여 교회에 가두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증거인멸 차원에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것이 제암리 학살 사건(1919년 4월 15일)이다. 

 

문화통치

조선총독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 총독재임1916~1919)는 강경하게 3.1운동을 진압하면서 3.1운동후 6개월동안 2만여명에 달하는 만세시위자를 구속하기에 이르는데 이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무력탄압이 국제적으로 여론화되면서 열강들이 일제히 일제(일본제국)를 비난하고 공격하기에 이르자, 일제는 무력을 앞세운 무단통치로는 뿌리뽑을 수도 없고 외교적으로 타격이 갈 것을 우려해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3.1운동의 유탄을 맞고 해임되고 후임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총독재임1919~1927, 1929~1931)가 새로운 총독이 된다.

  교체
조선총독부 총독 무관  →  문관
경찰 헌병경찰제   →  보통경찰제
언론 일시완화 됨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일보]등 조선인의 신문발행 허가
관리 조선인 관리수 대폭 증가
교육 초등교육 확장

그러나 모든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단순히 여론에 대응하겠다는 표시로서 불과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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