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1911)
1911년(일제강점기1년) 일제가 조선의 항일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에 대한 암살모의사건을 조작해서 105명에 달하는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이다.
배경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가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1874~1926, 재위1907~1910)을 즉위시킴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일제는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1909)을 벌여 2개월간 6만여명에 달하는 의병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이후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넘어감에따라 식민지가 되고 조선에 대한 통치를 안정적으로 하기위해 모든 운동단체들을 발본색원하기위해 일제는 사건을 조작하기까지 하면서 이들을 소탕하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경술국치(1910)이후 수도 한양이 경성부로 바뀌고 일제에서 감독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통감재임1910~1916)가 취임한다.
이 때 당시 경성 북쪽(평안도)엔 신민회(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단체 : 계몽운동, 무장투쟁운동)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이 빠르게 전파되고있었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뿌리뽑기위해 이에 관련된 사건을 확대, 날조시키면서까지 이미지를 심어주고있었다. 그 와중에 터진 사건이 안명근 사건이다.
안명근 사건
안명근(1879~1927)은 안중근(1879~1910)의 종제로서 황해도 신천일대를 중심으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러 다녔는데, 그만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일제순사에게 잡혀서 경성부로 압송되고 만다.
근데 때가 마침 일제가 항일운동에 촉각을 세울 때 벌어졌던 사건이라,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을 위한 모금 활동으로 날조하고, 신민회 소속이 아니였던 안명근을 신민회의 명을 받았다는 것으로 날조해 이에 대한 명분으로 신민회 회원, 독립운동가 600여명을 잡아들여 모진고문을 가하고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김근형(), 정희순()은 고문도중 사망하고 만다.
고문이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한두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고문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한다(앞선 글들을 잘생각하시길). 이 과정에서 신민회의 관련 인사와 정책등을 알아내게 된다.
105인
600여명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징역5~10년)하면서 이 105명은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하고 일제는 이들을 경성복심법원으로 보내고 이곳에서 105명중 99명이 무죄로 석방된다. 이는 이사건이 날조로 인해 발생된 것이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지도급 인사6명은 징역형을 받게 된다.
생몰년도 | |
윤치호 | 1865 ~ 1945 |
양기탁 | 1871 ~ 1938 |
안태국 | ? ~ 1920 |
이승훈 | 1864 ~ 1930 |
임치정 | 1880 ~ 1932 |
옥관빈 | 1891 ~ 1933 |
이후 이6명도 고등법원에 상고한 끝에 1913년 10월에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지만, 일제는 바로 안풀어주고 1915년이 되어서야 특별사면 형식으로 풀어주게 되면서 105인 사건이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