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1895)
일제가 조선의 왕비인 명성왕후 민씨(민비, 1851~1895)를 살해한 사건.
배경
일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조선에대한 지배를 강화하려고 하면서 친일내각이 득세하다가 갑오개혁(1894~1896)을 계기로 강대국인 러시아에 접근해서 일제 세력을 저지하기위한 작전에 들어가는데 이를 안 일제 정부가 조선에 상주해있던 일제 공사 미우라 고로(1847~1926)를 사주해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의 왕비 명성왕후(1851~1895)를 암살하기위한 작전에 들어가는데..
과정
I. 미우라 고로
일제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는 을미사변이 있기 한달 전에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선물을 바치면서까지 왕실의 안전을 약조한다. 고종 부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작전. 이후 1895년 9월이 되자마자 미우라 고로(1847~1926)가 새로운 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II. 모의
미우라 고로의 주도로 그의 아래사람들이 모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흥선대원군(이하응, 1821~1898)과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 4명(오카모토 류노스케, 호리구치 구마이치, 구스노세 유키히코, 우치다 사다쓰치)은 제외되었다.
이들은 모의를 하면서 외관상으로는 왕후 시해의 배경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꾸미고 이전 갑오개혁때 궁 점령을 지휘했던 군인이 맡았다. 그리고 하나의 걸림돌이였던 2차 갑오개혁 당시 일제에 의해 창설된 부대인 조선인 훈련대가 있었다.
이들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 부대였는데, 미우라는 훈련대가 대원군의 입궐을 호위한 후 그 틈을 틈타 왕후를 시해하려고 계획한다.
III. 여우사냥
이들은 명성왕후 시해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는데, 생각보다 조선인 훈련대가 빨리 해산되면서 거사일을 1895년 10월 8일 새벽4시로 정하게 된다. 이들은 이날 새벽 흥선대원군과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고종의 친형, 1845~1912)을 납치한 후 경복궁으로 향하는데, 이 때 일본인 교관들은 훈련을 구실로 조선인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고,
새벽5시경 이들과 궁궐 시위대병사(연대장 홍계훈)10여명이 희생되면서 총성이 궁 전역에 울려퍼지면서 동서남북 문으로 조선군이 호위를 위해 들어오지만 무기의 열세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이들이 명성왕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침입해온다. 명성왕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IV. 을미사변 참여 인물들
이들중 조선인은 을미사변당시 협력자이자 명성왕후 살해에 가담한 고위 인사들.
명단 | |
조선인 | 우범선(1857~1903) 이두황(1858~1916) 이진호(1867~1946) 유길준(1856~1914) 구연수(1866~1925) 권동진(1861~1947) 조희문(1858~1941) |
일본인 | 미우라 고로(1847~1926) 오카모토 류노스케(1852~1912) 구스노세 유키히코(1858~1927) |
축소, 은폐
이들은 명성왕후를 시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왕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빠져나갔고, 이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 공사는 이사태에 대한 고종의 부름으로 입궐하지만 고종에게 오히려 핍박해 당일내로 신 내각을 조직하라고 주장한다.
고종의서명도 없이 고종이 명성왕후를 폐한다는 조칙을 멋대로 내리게 해버리고 시해사건을 조선인 훈련대와 순검(개화기 경찰)과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날조하기에 이른다.
사건 이후
그러나 명성왕후를 시해한 이후 국제적인 비난과 함께 조선의 반일운동을 더욱 격화시킴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들의 만행이 드러나게 되면서 열강들이 일제에 압력을 가하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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