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환국(1727)
1727년(영조3년)에 일어난 환국. 사실상 마지막 환국이자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벌어지게 된 환국.
배경
I. 신임옥사
1716년 병신처분(송시열과 윤증간의 회니시비에 윤증의 잘못으로 판정한 정치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연잉군의 배경)은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려하는데, 1720년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이 승하하고 경종(1688~1724, 재위1720~1724)이 즉위하면서 노론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필두로 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삼으래서 삼아주고 심지어는 경종의 병을 빌미로 대리청정까지 요구하게 되면서 역린을 건드린 노론이 신임옥사(1721~1722, 신축옥사+임인옥사)로 몰락하게 된다.
아래표는 노론4대신.
생몰년도 | 비고 | |
김창집 | 1648 ~ 1722 | 김상헌(1570~1652)의 증손, 노론의 영수, 김조순의 4대조 |
이이명 | 1658 ~ 1722 | 세종 12남 밀성군(1430~1479)의 후손, 실학의 근간을 닦은 인물, 노론 |
이건명 | 1663 ~ 1722 | 좌의정, 영의정 이경여의 손자, 노론 |
조태채 | 1660 ~ 1722 | 우의정, 노론 |
II. 을사처분
1724년 경종이 36세로 승하하고, 세제 연잉군이 조선21대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미 신임옥사에서 자신의 든든한 배경이였던 노론4대신이 김일경(1662~1724), 목호룡(1684~1724)의 거짓고변으로 인해 모두 목숨을 잃었던것에 이 둘을 체포해 처형하기에 이른다. 노론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한 나머지 대신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게 됨. 이렇게 해서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고 1725년 을사년 영조는 신임옥사를 무옥(무고사)으로 판정하고 위와같이 옥사때 처벌된 노론 대신들의 신원을 복구하는 을사처분(1725)을 단행하게 된다. 우의정 정호(1648~1736)와 좌의정 민진원(인현왕후의 작은오빠, 1664~1736)등의 노론정권은 소론을 모두 다 없애고싶은 마음에 영조에게 이들을 처단할 것을 올리지만..
1727년 영조는 오히려 소론을 기용함과 동시에 핵심 보직의 기존 노론대신들을 파직시키고 소론을 기용한다. 영의정에는 소론 이광좌(1674~1740), 좌의정에도 소론 조태억(1675~1728)이 임명되고 소론60여명이 석방됨과 동시에 100여명의 노론이 파면되면서 정국이 급작스럽게 소론으로 되니.. 이것이 정미환국.
탕평책
이렇게 영조는 즉위과정이 극심한 당쟁으로 인한 폐해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당쟁보다는 온건파를 기용해 최대한 마찰을 줄이고자 하여 기존의 노론을 파면하고 소론또한 불러들이면서 탕평책을 기용하게 된다. 이과정에서 기존 노론세력인 3정승의 사직상소를 받아들이고 소론 인물을 앉히게 된다.
품계 | 직위 | 노론 | 소론 |
정1품 | 영의정 | 정호(1648~1736) | 이광좌(1674~1740) |
좌의정 | 민진원(1664~1736) | 조태억(1675~1728) | |
우의정 | 이관명(1661~1733) | 홍치중(1667~1732) |
탕평책은 붕당 형성으로 인한 당쟁을 막고,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된 영조의 정책으로서 온건파 대신들을 기용하고 소론까지 기용하면서 최대한 당쟁을 줄이고, 이전 1575년 동서분당때 문제가되었던 직책인 이조전랑(정5품 정랑+정6품 전랑)의 막강한 권한을 축소시키면서 사건이 될만한 요소들을 축소시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영조의 뜻대로 탕평책이 추진되면서 당쟁이 점차 사그라드는 분위기에서 영조가 노론,소론의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써 왕권강화까지 맛보게 된다.
이인좌-정희량의 난
1728년 발생한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1688~1724, 재위1720~1724)의 승하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어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인좌(1695~1728)가 일으킨 난. 이인좌를 필두로 한 주동세력이 밀풍군 이탄(소현세자의 증손자, 1698~1729)을 군주로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난의 주동자 대부분이 소론 강경파(준론)이여서 당시 탕평책으로 소론을 기용했던 영조에게서도 부담이 되어버려 소론세력이 타격을 입어서 다시 노론세력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이인좌는 초기에 진압을 당해 그 세력이 와해가 되었는데, 정희량(?~1728)이 이끄는 영남군이 최후까지 저항을 하는 바람에 이 사건이후 50여년간 경상도는 안동을 제외한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