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IV d'Outremer, 920 ou 921~954, 재위936~954
출생
920 ou 921년에 서프랑크 왕국 (Laon, 현Hauts-de-France주)에서 아버지 단순왕 샤를3세(Charles III le Simple, 879~929, 재위898~922)와 어머니 웨식스의 에드위지(Edwige de Wessex, ?~951)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군주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 922년 아버지 샤를3세가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어 몰락한 후 어머니 에드위지와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해 외할아버지 대 에드워드(앨프레드 대왕 아들, Édouard l'Ancien, ?~924, 재위899~924)의 궁정으로 피신한다. 이후936년 서프랑크 군주로 즉위하는데 긴 망명이후 돌아와서 군주가 되었다 하여 해외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위그가문의 성장과함께 카롤링거 왕조의 왕권이 추락하는시점의 군주.
아이고 아부지
922년 아버지 샤를3세가 로트링겐(로렌)만 신경쓰고 자기들 네우스트리아(메로빙거 귀족체)를 소외시킴으로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면서 이들은 로베르1세(Robert Ier, 860~923, 재위922~923)를 새 군주로 뽑는다. 샤를3세는 바이킹의 지원을받아 로베르1세 군과 싸우지만 수아송 전투(923)에서패배하고 자객을 보내 로베르1세를 암살하는데는 성공하지만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어버리는데.. 이때 함정을 놓은 인물이 로베르1세의 처남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2세(Herbert II de Vermandois, 880~943, 재위907~943)이다. 그렇게 잡혀있으면서도 샤를3세는 복위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929년 사망.
로베르1세 암살이후 군주위는 로베르1세의 사위인 부르고뉴 출신 라울(Raoul, 890~936, 재위923~936)에게 건너가면서 루이4세의 어머니 에드위지는 아들 루이4세를 데리고 아버지 대 에드워드가 통치하는 잉글랜드로 피신하게 된다.
사실상 유년기를 외할아버지가 통치하는 잉글랜드에서 보내게 된다.
라울
로베르1세의 사위인 라울이 장인어른이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고 서프랑크 군주로 오르게 되는데, 왕위에 오르고 서프랑크 남부 귀족들은 왕이 바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소식을 듣고 샤를3세를 복위하라고 요구하게 되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뭐 924년에 남부귀족 대표자격인 아키텐 공작 기욤2세(Guillaume II, )와 협상을 벌여 내분을 종식시킨다.
문제는 동서인 백작 헤르베르트2세가 샤를3세를 잡은 명목으로 라울에게 이권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트러블이 나고 재위기간 내내 트러블이 있다가 936년 라울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에 있던 루이가 서프랑크 귀족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돌아온다.
즉위
랑(Raon)에서 루이를 기다리고 있던 랭스(Reims) 대주교 에게 왕관을 받고 정식으로 서프랑크 왕이 된다. 이때가 936년. 파리(Paris)는 당시 파리 백작 위그(대 위그:위그 카페의 아버지, Hugues le grand, 898~956, 재위923~956)가 실권을 차지하고 있었기때문에 둘의 대립은 이미 기정사실.
어쨌든간에 협상을 벌여 왕국의 안정을 찾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에라도 빨리 협상을 벌여야 했는데, 대 위그는 루이4세가 자기의 입맛데로 뜻을 안받아들이게 되면서 대립은 점점 거세지게 된다.
거참 말 안듣네 자슥
루이4세는 대 위그를 견제할 차원에 독일의 지원을 받고자 동프랑크 군주 하인리히1세(Heinrich Ier, 912~)의 딸 게르바르가(Gerberge de Saxe, 913 ou 914~?)와 정략 결혼을하는데 이에 대 위그 역시 하인리히1세의 딸 에드위지(Hedwige de Saxe, 914 ou 921~959 ou 965)와 결혼하면서 둘은 동서지간(!)이 되어버리는 웃픈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939년 루이4세가 노르망디 지역을 복속시키면서 대 위그와 헤르베르트2세, 노르망디 공작 기욤1세등과 동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루이4세는 신성로마제국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를 못두고보던 교황 스테파노8세(Stephanus PP. VIII, ?~942, 재위939~942)가 이들을 중재하게 되면서 교황의 이름으로 루이4세를 군주로 인정하고 반대의 뜻을품은 자들은 교황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선포를 하게 되면서 귀족들은 꼬리를 내린다.
교황 말 그게 뭐 중요함?
이들은 표면적으로 교황말을 듣는 척을 했을뿐.. 940년 헤르베르트2세가 루이4세가 다스리던 랭스(Reims)를 점령하고 랑(Raon)까지 공격해오면서 루이4세는 최대한으로 방어를 한다 만.. 패배하고 나서 보니 오토1세(Otto Ier, 912~973, 동프랑크재위936~973, 신성로마재위962~973)가 과거 루이4세가 로트링겐(로렌)지역에 야욕이 있었던것을 이유로 대 위그와 헤르베르트2세의 군대에 지원을 해주면서 패배하게 된 것이였다.
그렇게 942년 오토1세와 평화조약을 맺고 대 위그와도 화해하게 되는데, 평생의 숙적이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게 한 헤르베르트2세를 공격하여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게 함으로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된다.
그렇게 화해한 위그 가문이였지만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만 945년 노르망디를 다시 재차지 하려다가 체포되어 대 위그에게 넘겨져 파리의 감옥에 투옥. 매제 오토1세의 개입으로 1년만에 풀려난다.
말년과 사망
풀려난 이후에도 대 위그와의 트러블은 계속 지속되면서 티격태격 하다가 954년 랭스(Reims)부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사고로 급사한다. 이후 서프랑크 왕위는 아들 로타르(Lothaire, 941~986, 재위954~986)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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