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고려의 군주

2대 혜종(고려)

Mintaka5 2024. 8. 2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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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jong de Goreyo, 912~945, 재위943~945

 

 

출생

912년 태봉국 나주 목포 나주 오씨부인(장화왕후) 사저에서 아버지 왕건(태조, 877~943, 재위918~943)과 어머니 나주 오씨(장화왕후, ?~?,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무.

 

배경

태조 왕건의 장남으로서 무인이다. 아버지 왕건과 함께 젊은시절 함께 전쟁터에 가서 많은 전공을 세운점으로 봐서 조선 2대 정종(1357~1419, 재위1398~1400)과 닮은점이 많은데, 정종역시 대업을 위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따라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같은 태조의 다음 왕위를 이었다는점, 둘다 장남이라는 것[다만 조선 정종은 차남이였지만 위인 형 장남 이방우(1354~1394)가 사망하고 사실상 장남이 된다]그리고 군주에 오르지만 짧은 재위기간(둘다 2년), 미약한 권력등으로 평가가 다소 낮게된 군주라는 점에서 또 비슷하다. 

태조 왕건의 첫째부인인 신혜왕후 류씨(?~?)가 자녀가 없었기에 왕무는 사실상 태조의 장남이 된다.

 

빨래터에서 내가 생겼어? 

이글은 출처가 있습니다.

태조 왕건이 태봉의 군주 궁예(869~918, 재위901~918)의 장수로서 903년 군대를 이끌고 가 후백제령인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시냇가를 걷던 왕건의 눈에 처녀(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뒤에 오색구름같은 기운이 서려있었다고 전하는데 처녀를 보고 바로 반해버린 왕건은 밤에 바로 직진한다. 여인의 임신을 원하지 않았던 왕건은 돗자리에 사정을 한다(질외사정). 그러나 여인은 전날 밤 용이 자신의 뱃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왕건이 흘린 정액을 질에 쓸어 넣고, 그렇게해서 아이를 임신하고 태어나는데 그이가 혜종 왕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잘 안되는 논리라, 왕건이 자식을 원치않았다는 것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는 대목이 된다. 왜냐하면 정말로 아이를 원치않았으면 오씨 부인을 왕후로 삼았겠는가?

그렇지만 오씨는 그 출신이 빈약해 이후 아들 무가 정윤(태자)가 될때 호족들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그리고 고려는 당시 창업한지 몇년 되지 않았던 탓에 법도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태자옹립역시 그 기준이 없었다)하는 염려가 있었다.

위 빨래터 내용은, 혜종이 고려2대 군주로 즉위하고나서 그 빨래터는 이후 용흥사(용이 나타났다!)라는 절이 되었다[출처- 고려사, 1451]

 

나도 후삼국통일 공신이여

918년 태조가 고려왕조를 개창하고, 921년 태조는 박술희의 태자옹립 여론에 따라 아들 무를 정윤(태자)으로 삼게된다. 당시 왕위계승자에 해당하는 작위는 '정윤'이다. 이때부터 태자 무 역시 아버지 태조를 따라 전쟁터에 참가하게 되는데, 932년(무가 20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와 북방을 순시하고 935년엔 신라 마지막 군주 경순왕(56대, 897~978, 재위927~935)이 고려로 귀부를 요청하면서 992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는 시점이 된다. 

그해 후백제에서도 견훤(867~936, 재위900~935)이 장남 견신검(885~?, 재위935~936)이 아버지가 장남인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않고 이복형제 견금강(?~935)에게 물려주려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켜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전북특별자치도 김제소재 사찰)에 유폐시킨다. 반란 종료후 몇달간의 대리청정을 거쳐 935년 말 후백제 2대 군주로등극한다.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몇달만에 탈출해 고려로 망명을 하게 되면서 태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출처- 태조왕건 대사: 이보시오 황제.. 내가 세운 제국을 무녀뜨려주시오.. 신검이도 역시), 이 요청을 받아들인 태조가 936년 출정해 일리천 전투(후삼국 최후의 전투이며 견훤은 고려군으로 참전해 후백제군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게되면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바람에 후백제군 대패한다, 드라마 태조왕건 199회 장면)에 정윤 왕무에게 군대를 주어 선봉대로 나서게끔 하고 이전투는 고려의 대승리로 끝이나면서 후백제까지 흡수되게 되며 후삼국시대가 끝나고 고려의 통일로 마무리되게 된다.

 

즉위

I. 불안한 재위시작

943년 태조 왕건(877~943, 재위918~943)이 65세의일기로 승하하면서 2대 혜종(912~945, 재위943~945)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근반이 빈약해서 재위에 오르기전에 호족들의 방해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광 박술희(871~945)의 도움으로(여론을 잘 만듬) 즉위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아직 즉위까지만해도 건국하고 통일되지도 얼마 되지않은 상태에 법에대한 기준점도 모호했던 상황이라 이복형제였던 왕요(3대 정종)와 왕소(4대 광종)가 왕위를 계속 엿보았던 상황이였다.

II. 왕규의 난

왕요와 왕소가 왕위를 엿보던 것을 눈치챘던 호족 왕규(?~945)역시 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는 광주(경기도 광주)호족으로 태조가 재위할 시절에 두 딸(태조의 15비 광주원부인, 태조의 16비 소광주원부인)을 시집보내고, 혜종에게도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실상 외척으로서는 상당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뻔한 스토리, 태조와 딸 소광주원부인(생몰년미상)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900~945)를 왕위에 앉히고 권력을 누리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혜종이 즉위하고나서 왕규는 혜종의 최측근이자 사실상 든든한 버팀목이였던 박술희(871~945)를 제거하고 난 이후부터 더욱 과감하게 행동을 하게 된다. 

박술희가 죽고 가지고있던 대광자리를 왕규가 이어받게 되는데, 사실상 외척세력의 대장으로서 권세가 엄청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혜종을 살해하기위해 자객도 보내고, 급습하여 죽이려 했으나 혜종은 무인답게 직접 처리하거나 점성술사이자 대신인 최지몽(907~987)에게 조언을들어 거처를 옮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 이후 점점 음모가 심해지면서 불안증세가 나타났던 혜종은 항상 주변경계를 단단히 했지만 불안증세로 제대로 정무를 볼 수가 없을만큼 증세가 악화되게 된다. 

왕규는 혜종이 병석에 누을때 쯤 난을 일으키지만, 왕요(정종)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해 난은 실패하고 말고 왕규는 체포되어 유배보내진 후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세력모두 처형. 이것은 고려 정종(923~949, 재위945~949)게시물에도 나와있지만 정종역시 다음 계승자에 가까운 인물로서 왕규를 이용해 군주가 되었을 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을 소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승하

이런 복잡한 상황속에서 혜종은 945년 병으로 눕게되고 그해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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