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ngjong de Goreyo, 961~997, 재위981~997
출생
961년 고려 개경 내천왕사에서 아버지 대종 왕욱(추존왕, 왕건의 아들, ?~969)과 어머니 선의왕후(추존왕후, ?~?)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981년 경종(955~981, 재위975~981)이 자신의 아들 왕송(목종, 980~1009, 재위997~1009)을 대신해 사촌동생인 왕치(성종, 961~997, 재위981~997)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 치세기간동안 거란족의 침략 효과적 방어(서희 외교담판), 불교정책에 반한 유교적 통치, 봉건제도 확립, 행정개혁등으로 나름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군주로서 그 업적이 많아 사후 묘호가 성종이다. 조선의 성종과 닮은 점이 많다.
즉위
경종이 성종에게 왕위를 양위함에 앞서, 성종에게는 친형 효덕태자(?~?)가 있었지만 광종의 사위였다는 추측으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있던 경종이 이 효덕태자를 제치고 성종 왕치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였을까 전해지고있다.
즉위 2년차인 982년 최승로(927~998)를 등용하여, 최승로의 정치 개혁도 시무28조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시작되지만 시무28조를 세부적으로보면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최승로는 신라 귀족가문 출신이였으며(경주 최씨), 전체적으로 신하를 우대하고,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여 권한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기용하고, 신분제 강화를 주장하는 내용인데(음서제강화, 노비환천법 실시) 신분제 강화는 고려 중, 후반기로 갈수록 팽배해지는 신분제 고착으로 인한 폐단(노비들의 사회진출, 권문세족의 횡포등)이 벌어지는 시발점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음서제(귀족은 과거안봐도 바로 등용되는)는 원래 그렇다 쳐도, 노비환천법은 4대 광종(925~975, 재위949~975)때 실시한 노비안검법(956)을 다시 무효화 시켜 해방되었던 노비를 다시 노비로 돌리는 작업을 말하는건데 이것이 시무28조의 통과로 실현되게 된다.
이로서 귀족의 기득권이 팽배해지며 더욱 신분간의 격차가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자자 스톱
물론 완전 안좋은 것만 있는게 아니고, 982년 5품이상의 직급으로하여금 정치전반에 참여시켜 득실을 논하게끔 하고, 유교군주답게 국자감에서 유학교육 강화, 문물제도 정비등으로 고려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는점, 본인이 바라던데로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그 내용으로는 983년에, 중앙 집권 체제 확립으로인한 관제 시스템을 2성 6부제를 실시하게 되는데, 원래는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의 시스템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호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사실상 이곳으로부터 호족의 권력이 나오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내의성만 왕의 명령을 대변하는 기관.
다행스럽게도(?) 광종때 호족을 대숙청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어진 것. 사실상 대숙청이후부터 자연스레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성종은 이에 한술 더 떠 확실하게 왕권강화를 고착시키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을 하게 됨.
그래서 다음과 같이 개편되게 된다.
기존시스템 | 983년 개편 | 995년 개편 | ||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 |
▶ | 내사문하성, 어사도성(2성) | ▶ | 내사문하성을 중서성, 문하성으로 분리 어사도성을 상서도성으로 변경 |
선관, 민관, 형관, 공관, 예관, 병관(6관) | 6관을 6부로 바꾸고 상서도성에 예속 |
당나라(618~907)의 제도를 모방한 것.
두 여동생 사건
성종치세때 왕권이 실추된 사건이 있었는데,
성종에게는 헌애왕후(964~1029, 경종의3비, 목종의 어머니), 헌정왕후(?~993, 경종의4비), 사촌 헌숙왕후(?~?, 경종의 왕비, 신라56대 경순왕의 딸)친누이 두명과 고종사촌이 있었는데 근친혼 정책을 쓴 광종에 의해 모두 경종의 왕비가 됨.
경종 사후 모두 흩어지는데 헌정왕후는 궁 외부 사저에 살고있었는데, 이웃집 이복 숙부인 안종(왕욱, ?~996, 태조왕건의 아들, 현종의 아버지)과 정분이 나는데, 왕욱의 집 가노(노비)가 일부러 집에 불을질러 어그로를 끌어 성종과 대신들이 오게끔 하는데 이때 안종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성종에게 걸리게 되면서 안종은 유배, 헌정왕후는 안종의 유배길 배웅차 나간길에 돌아오다 산통으로 대량원군(현종)을 낳다 사망.
그리고 헌애왕후도 궁에 머물면서 정치가이자 승려가 된 김치양(969~1009)과 간통하다가 적발. 김치양 역시 유배.
거란....? 뭐하는 애들이여?
993년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하고 나서 즉위초기 국가를 안정시키려는 명목으로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는데, 대신들은 고려영토 일부를 줘서 평화협정을 맺는게 어떻겠냐고 하지만, 화친을 반대하는 파 역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서는데 이 반대파의 핵심에 서희(942~998)가 있었다. 성종은 일단 전쟁을 피하기위해 재상 서희를 보내 외교적으로 풀고자 하였는데,
서희는 안주까지 당도한 요나라 대장군 소손녕(소배압의 동생, ?~996)과 담판을 짓게 되는데, 이때의 담판으로 요나라의 목적이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것임을 알아채고 서희는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고 더불어 요나라는 압록강 동쪽땅을 고려의 영토로 인정하게 되면서 994년 이곳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이곳이 바로 강동6주이다.
말년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자식을 얻는데 실패한 성종은 997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조카 왕송(목종, 980~1009, 재위997~1009)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하게 된다.
묘호는 성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