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gjong de Goreyo, 923~949, 재위945~949
출생
923년 고려 개경에서 아버지 태조 왕건(877~943, 재위918~943)과 신명순성왕후 유씨(태조의 3비 충주부인, 생몰년미상)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왕요. 위로는 일찍 죽은 형 두명이 있고 아래로는 동생 4대 광종 왕소(925~975, 재위949~975)가 있다. 이복형으로는 2대 혜종 왕무(912~945, 재위943~945)가 있다.
배경
고려가 건국되고나서 태어난 첫 군주로서 왕족과 호족 세력간의 갈등과 더불어 이들을 손봐서 왕권강화를 도모하고자 했던 군주이다. 야심이 있던 인물로서 태조와 혜종의 최측근 박술희(871~945)와 왕규(?~945)등을 제거하고 이복 형 혜종이 병으로 승하하면서 3대 정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짧은 재위기간(2년)동안 국가를 세운 근간인 호족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로 고민하던 군주다.
이것들을 어떻게 조지지?
고려는 애초에 호족들의 지지로 세워진 국가(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도 송도의 호족이였다)로서 호족들의 권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당장에 눈치를 안볼 군주가 없을 정도였는데 이는 태조가 왕비들을 각 지역 호족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맞아 혼인했기 때문이였다. 태조가 승하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족들은 각 세력을 점점 키우면서 그 세가 점점 강해지면서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함에 따라 야심차고 강한 성품이던 왕요는 이를 그냥 두고볼 수 없었기에 이들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된다.
군주의 외척들로서 사실상 세도를 부리던 호족들중에서도 강한 세력을 형성한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안 왕요는 자신을 지지하던 당숙부인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 개국공신, ?~949)과 함께 대책을 세우는데 945년 혜종이 승하하자마자 왕요가 고려3대 정종(923~949, 재위945~949)으로 즉위하는데, 이때다싶은 상황에 왕규가 정종즉위즉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왕규의 난(945)이다.
이미 사전에 음모를 알고 대비를 했던 정종과 왕식렴인지라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마자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에들어와서 정종을 호위하게되면서 난은 시행되지못하고 왕규는 체포된 후 유배보내졌다가 유배지에서 살해된다. 왕식렴은 정종에게 왕규의 난 진압의 공을 치하하여 광국익찬공신에 대승된다.
재위
945년 재위이후 바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뒤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개경(현 경기도 개성)에서 서경(평양특별시)으로 천도를 천명하게 되는데 호족, 공신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반발한다(그도 그럴것이 이미 아버지 태조 왕건때부터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개발해서 수도인 개경에 맞먹을 만큼 정비하고 발전시키기에 이르는데, 서경이 당시로치면 고려 북방의 주요 거점도시로서 경제도시 같은 역할의 도시로, 이곳으로 천도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정종의 생각이 엿보인다. 천도가되면 호족, 공신들의 권력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 이 불만이 호족, 공신에 이어 백성들까지 불만에 휩싸이게 되면서(토목공사가 너무 규모가 커요!)천도 계획은 취소되면서 정종은 무너진 군주의 자존심과 더불어 왕권이 더욱 불안해지는 결과를 얻게된다.
이것들이 어딜 쳐들어올라고
947년에 후진[오대십국시대 3번째 왕조, 진나라(265~420)와의 구별을 위해 후진이라고 명, 금나라의 예시랑 비슷(1100년대 금나라, 1600년대 후금]에서 유학하고있던 최광윤(생몰년도 미상, 문신, 빈공진사) 거란군의 포로로 붙잡혔으나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거란에서 벼슬을 하고있다가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때 최광윤이 정종에게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준비를 하고있습니다라고 보고하면서 정종은 거란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947년 광군사(현재의 예비군과 비슷함. 거란침입을 막기위해 설치한 지방호족 지휘아래 있던 농민예비군)를 설치하여 방비케끔 한다. 그리고 대광 박수경(?~964)에게 거란과의 국경지대인 덕성진(평안북도 영변군)에 성을 수축게끔 한다.
승하
정종 자신이 계획했던 개혁들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불안증세를 느껴 동복동생 왕소(광종, 925~975, 재위949~975)까지 의심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948년 말, 여진이 고려에게 말 700필, 토산물등을 바쳐 정종이 직접 검열을진행하던 중에 갑자기 번개, 천둥소리에 놀라 병져 누워있다가 949년 3월 죽기전에 왕세제 왕소를 불러 양위하고 승하하게 된다.
아들로는 경춘원군(?~960)이 있었지만 아우 왕소가 광종으로 즉위하고 왕족 숙청때 경춘원군은 이복형 흥화궁군(혜종의 아들)과 함께 처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