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eonjong de Goryeo, 992~1031, 재위1009~1031
출생
992년 고려 개경 헌정왕후 사저에서 아버지 왕욱(추존왕 안종, ?~996)과 어머니 황보씨(경종의 4비, 964?~992)사이에서 태어남. 본명은 왕순.
배경
한국사 최초의 사생아 군주이며, 불륜관계였던 부모[아버지 왕욱은 태조 왕건(877~943, 재위918~943)의 아들이고,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였고(친척), 헌정왕후는 5대 경종(955~981, 재위975~981)의 4비였는데 경종 사후 왕욱과 정이 나게됨] 모두 992년 996년 사망함으로서 5살도 안된나이에 고아가 된 것도 모자라 이모 천추태후의 음모로 절에 들어가 중이된적도 있다. 강조의 난으로 즉위한 이후 거란의 칩입에 대한 방비, 민심안정등등등 여러 일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해내며 개혁을 시행하면서 안정시킨다.
초조대장경도 현종 치세때 나오게되는 국가적 유물이다.
런
사촌형 목종(980~1009, 재위997~1009)의 어머니 천추태후(현종의 이모, 헌애왕후, 964~1029)가 경종 사후 김치양(969~1009)과 정분이 나 몰래 아들을 낳고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대량원군은 이모에 의해 절에 강제로 보내져 승려가 되어 여러차례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해대서 목종과 승려들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기고 옮겨진 곳(신혈사,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에서도 목숨을 노리게 되면서 주지승이 땅굴을 파 대량원군을 대피시키는 등의 기지로 목숨을 지키게 된다.
갑자기 재위에 오름
이렇게 이모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음모에 계속 피해다니다가 목종이 이들을 견제하고 대량원군을 확실하게 자기의 다음왕위를 이을 계승자로 삼기위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1011)을 은밀하게 불러들인다. 그러나 강조는 오는길에 평주(황해도 평산)에 도달하기 이전에 목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끌고 오던중이였는데, 평주에서 그 소문이 진실이 아님을 알게되지만 결국은 개경으로 그대로 밀고들어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8대 현종(992~1031, 재위1009~1031)으로 즉위시키게 된다. 그리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은 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는 유배보내지게 된다. 그리고 목종은 유배지가던길에 암살. 이것이 1009년 벌어진 강조의 난이다.
요...나라가?
어찌저찌 현종이 즉위를 하게 되지만, 1010년 요나라(거란)이 강조의 난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을 옹립시킨 강조의 죄를 묻겠다며 요 성종(야율융서, 972~1031, 재위982~1031)이 40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게 된다.
이는 993년 고려-거란간 전쟁이 서희의 외교술로 공식적 외교관계를 체결하면서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에 조공을 바치는 사이였기에 요 성종이 저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 이 1010년에 벌어진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한다.
이에 현종은 강조에게 요나라 군대의 수에 맞먹는 군대를 주어 방어하게끔 하지만, 강조가 통주 대전(1010)에서 대패하고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되고, 전선이 무너지면서 개경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나주로 피난가게 된다. 피난길은 말그대로 아수라장 이였고, 서로 뿔뿔히 흩어지는 상태에서 피난을 지속할 정도. 그러나 전쟁중에도 아이는 태어난댔던가... 충청도 공주(현 충남 공주)에 머물렀을 때 김은부(절도사,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 ?~1017)의 딸들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이 세자매는 2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궁에 들어와 현종의 후궁이 된다.
작위 | 생몰년도 | 비고 | 기타 | |
첫째 | 원성왕후 | ?~1028 | 현종의 왕비 | 9대 덕종(1016~1034, 재위1031~1034), 10대 정종(1018~1046, 재위1034~1046)의 어머니 |
둘째 | 원혜왕후 | ?~1022 | 현종의 4비 | 11대 문종(1019~1083, 재위1046~1083)의 어머니 |
셋째 | 원평왕후 | ?~1028 | 현종의 7비 | 바로위 언니 원혜왕후가 서거하면서 입궁해 왕비가 됨. 효경공주(?~?)의 어머니 |
거란군은 개경까지 급속도로 행군하며 흥화진(평안도 의주)을 포함한 구주, 통주, 서경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오는바람에 이들로 인해 병참선이 차단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고려에서는 하공진(?~1011)과 고영기(?~?)를 거란진영에 보내 군대를 돌리라고 간청하게 되면서 요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만 하공진과 고영기를 억류시켜 볼모로 끌고 군대를 다시 본국으로 물리게 된다.
1011년 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귀주(현 평안북도 구성시)에 진을 치고 거란군을 기다리던 양규(?~1011)와 김숙흥(?~1011)이 거란군을 기습하게 되면서 수천명의 군사를 죽이고 포로 남녀 수천명을 구출하고 이어서 계속 거란군을 추격해서 똑같이 포로를 구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지게되면서 요 성종의 군대에 의해 전사한다.
이들이 철수하고 난 뒤 현종은 이 2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인해 1010년 사적들이 다 타버리면서 1013년에 편찬명령을 내려 시작함으로서 칠대실록(초대 태조~7대 목종까지 7명의 군주에 대한 실록)이 20년간의 과정을 거쳐 덕종3년(1034)에 완성된다.
그만좀 와라..
I. 3차 고려-거란 전쟁
1018년엔 요나라 황제 성종(야율융서, 972~1031, 재위982~1031)이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면서 소배압으로 하여금 다시 고려로 쳐들어오는데 이가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이다. 이는 현종이 1013년(현종4년)에 거란과 국교를 끊고 송나라와 교류를 시작하면서부터 빌미가 제공된 것으로 1차침입때 내어준 강동6주를 반납하라고 한다. 고려는 물론 무시.
그래서 10만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여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청야전술(적군의 군수, 식량, 물등을 없애 말리게하는 전법)로 여러번 고통당하고 계속적인 기습공격에 의해 사기까지 떨어지고 이상태로 결코 개경을 점령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서 퇴각하게 된다.
II. 고이 돌려보낼 줄 알았나?
1019년 소배압이 군대를 퇴각시키고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948~1031)은 원수 강민첨(963~1021)과 함께 귀주에서 10만에 가까운 거란군을 귀주에서 거의 전멸시켜버리는데 이것이 귀주대첩(1019)이다. 비참하게 퇴각하던 소배압은 주군인 요 성종에게 극딜에가까운 책망을 당한다. 이로서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쇠퇴하게 된다.
현종의 큰 실수... 김훈, 최질의 난
1015년, 이미 종료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후 다음에 또 올수도 있는 침입을 대비해 군비를 확증시키는 과정에서 자금적으로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면서 관리들에게 지급될 녹봉이 부족해지게되면서 중추원 관리 황보유의(?~1042), 장연우(?~1015)가 군대의 영업전(녹봉으로 나오는 토지)를 뺏어 다른 관리들의 녹봉을 충당하려는 사실을 알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김훈, 최질의 난이라 불리는 반란이다.
김훈과 최질은 장연우와 황보유의에게 결박후 매질을 해대고 현종앞으로 둘을 끌고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여 현종은 일단 무신들이 어떻게 해를 가할까봐 일단 수락한다. 이들은 무신으로서 문신을 겸하게 되면서 여러 혼란이 발생하게는 되며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면서 여론이 좋지않게 변하자, 결국 현종은 1015년 초 서경유수판관으로 임명시킨 이자림을 서경으로 보내 공적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연회를 베풀게끔 하고 술이 취할때쯤 김훈, 최질등의 무신 19명을 살해하는데 성공하고, 난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하게된다.
승하
1031년 39세로 승하하게 되고 묘호는 현종. 대내외로 업적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
[etc.] KBS 2TV 드라마 고려거란전쟁(2023)에 현종이 자세히 묘사되어있으니 참고할 것. 많이들 보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