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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태조(조선)

Mintaka5 2024. 8. 1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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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jo de Joseon, 1335~1408, 재위1392~1398

태조 이성계,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에서 아버지 이자춘(추존왕 환조, 1315~1360)과 어머니 최씨(추존 의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남. 본명 이성계.

 

배경

일단 말이 필요없는 조선의 창업군주이다. 고려말기인 31대 공민왕(1330~1374, 재위1351~1374)시절 1355년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로 귀부하면서 쌍성총관부를 공민왕과 같이 협공해 되찾은 공로로 고려의 공신이 되면서 관직을 하사받고 정계에 진출하는 유력가문이 된다. 

그러나 동북면일대에서 거대 영주처럼 영향력이 컸고 자치권까지 있던 이자춘이 불안했던 고려 정계 어사대(고려의 감찰기구)에서 이자춘을 형식적으로 동북면 병마사지위를 주고 당시 고려에서 행해지던 기인제도(지방으로 파견된 관리의 아들을 개경에 인질처럼 붙잡아 두던 제도)로 이성계가 이때 개경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이 기회일지도?

이성계가 비록 개경에 인질로 붙잡혀있다고 하지만 공민왕이 머무르는 개경에서 친분을 쌓는 계기가 되어버리는데, 무인 이성계 답게 무력을 마음껏 펼치는 격구대회(물론 치고받고 죽기까지 할 수있는 위험한 대회지만, 장수를 뽑기위한 일종의 무인 과거제도라고 봐도 무방)에서 발군의 실력을 선보이며 공민왕의 눈에들어 1360년 아버지 이자춘이 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무관직책을 물려받을 수 있게되는 계기가 된다. 이때 동북면 병마도원수까지 이어받게 된다.

 

신궁

이성계는 특히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해지는데, 1380년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했던 해로 500여척의 왜구 함대가 금강일대로 쳐들어와 약탈, 방화등을 자행할때 최무선이 화포로 함대를 모두 격침시켜 퇴각로를 없애버려 내륙으로 왜구들이 쭉 침투할때 남원근처에 집결한 왜구를 이성계가 대적하게 된다. 

이때가 황산대첩인데 전투 당시 상대 왜구 장수였던 훌륭한 무예와 지휘력을 갖춘 아기발도(아기 장수, 1364?~1380)의 뛰어난 활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태에서 이지란(1331~1402)과의 환상적인 활 콤비로 아기발도를 화살로 전사시키면서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이후 1362년 함경도 지방에 쳐들어온 원나라 장수 나하추(?~1388)와의 격전, 1364년 원나라 기황후(1315~1369)의 작전으로 공민왕을 밀어내고 덕흥군 왕혜를 옹립하기위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막는등의 전과를 톡톡히 세운다.

 

안변책

이미 국경지대인 동북면에 머무르면서 원나라와 여진족등의 외침등으로 국토방위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였던 이성계가 우왕에게 고려 변경지역을 편안하게 할 책인 안변책을 제시하는데 아래의 표와 같음.

  안변책 4가지 내용 핵심
1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해 상시 군사 훈련을 시행해야 할 것 군사적 조치 : 평시상황 기본훈련 실시
2 토지 제도 붕괴로인한 군제와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것 토지의 소유정도에 따라 세금 납부제도 개편,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긴 백성들 추려 곡물 지원
3 사적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세족들을 엄벌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군량을 확보할 것 불법적 수단 방법에 의해 새고있는 곡물을 차단해서 비축할 것
4 유능하고 공정한 인물을 장수, 수령으로 선발해서 지방을 통치하게끔 할 것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 선발

이 안변책은 이성계가 직접 관여해있던 동북면에 한정되어있었다만, 동북면에서만 이득을 취할 내용이 아니였고 이곳에서 달성을 시켜 고려전역에 적용을 하고자하는 의지가 돋보임. 또한 이성계 독단적으로 발표한 건 아니고, 지지기반이 빈약하던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와 결탁해 그 도움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정몽주또한 이 안변책에 핵심적인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고있음.

 

위화도 회군

1388년 명나라 주원장(1328~1398, 재위1368~1398)이 철령 이북 땅(강원도 북쪽)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우왕과 최영은 이기회에 명나라와 실력대결도 해볼겸 요동지역을 정벌해서 주원장의 콧대를 꺾어놓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서 요동 정벌을 천명하게 되는데, 이성계가 이때 요동정벌을 사불가론으로서 반대주장을 펼친다. 아래표는 정종(조선)게시물에서 가져온 사불가론 내용 표이다.

  사불가론 4가지 내용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규모자체가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후폭풍이 클 것이다).
2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현재 장마로 인해 군량미를 옮기는데 무리가 많다. 가을로 늦추자).
3 고려 전역의 군사를 동원해 멀리 나아가면 그만큼의 후방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왜적이 침입 할 것이다.
4 장마철의 높은습도로 인해 활이 느슨해지고, 역병을 앓을 것이므로 즉시 회군시켜달라.

이런 주청에도 불구하고 요동정벌이 시행되면서, 최영(1316~1388)이 총사령관, 이성계가 우군도통사, 조민수(1324~1391)가 좌군도통사가 되어 5만의 대군을 이끌고 5월말경에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장마시기와 맞닥들여져 병사사이에서도 역병환자가 나오고 활이 느슨해지고 특히 압록강이 범람해 도저히 군량미를 이끌고 건널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여러차례 우왕과 최영에게 청을 하지만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정도의 의지까지 보여주는 환관 김환까지 위화도에 와서 이성계를 독촉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성계는 결국 이때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서 회군작전을 펼치게 된다. 

최영의 최선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5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 없었던 최영은 결국 우왕과 함께 회군한 군대에 체포되게 되면서 우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시키고 최영까지 처형시킴으로서 사실상 이성계가 권력을 잡게 된다.

 

개혁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권력의 핵심이 되면서 정도전(1342~1398), 조준(1346~1405)등과 함께 고려 기존의 기득권층의 저항을 쌩까고 토지개혁(사전혁파), 과전법등을 실시하지만 100여년에 가까운 권문세족들의 토지대장을 1390년 모두 소각시키지만, 결국 신진사대부로 부가 그대로 옮겨가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보지못하고 이미 썩을대로 썩은 권문세가의 뿌리가 고려전역에 깊숙히 뿌리내렸기에 이성계로서는 모두 썩은 뿌리를 잘라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거기다 이 개혁을 기점으로 온건파와 급진파로 또 세력이 나뉘게 된다.

  온건 개혁파 급진 개혁파
주요 인물 이색, 정몽주 정도전, 남은, 조준
주장 내용 고려왕조 보존, 점진적 개혁 추진 고려왕조 부정, 급진적 사회개혁, 왕조 교체

사실상 두 파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성계는 정몽주를 최대한 아끼고자 존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악화되기에 이르는데..

 

천운이 온 것인가..(정몽주) 아니네

그러다 마침 이성계는 1392년 사냥중 낙마사고로 크게 부상을 입게되면서 이틈에 정몽주와 공양왕(1345~1394, 재위1389~1392)이 급진파의 정도전, 남은, 조준등을 탄핵해 유배보내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 이성계는 개경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서 최대한 정몽주를 설득시키고 절차에 따라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이때 5남인 이방원(미래의 태종)이 정몽주를 제거해버림으로서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로서 이성계파가 조정을 장악해버리고 온건파들 모두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이후 정몽주의 배후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른다(1392년).

 

조선 건국

마침내 급진파들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급진파의 이념이였던 왕조교체를 간청함으로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다(민심을 우려해 1392년까진 고려, 1393년 조선으로 개칭). 기반이 빈약했던 태조는 명나라 주원장(홍무제, 1328~1398, 재위1368~1398)에게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지만 받아주지않고 고려 국왕을 대신하는 자라는 뜻인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리게 된다(1392~1401).

1393년 조선으로 개칭을 하고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실시하게 되면서 그곳을 한성부로 명명하게 된다. 이모든 계획의 총괄은 정도전. 태조와함께 개국공신으로서 국가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전을 반포, 고려시대때부터 이어지던 제도 계승등 나름 잘 꾸려나가게 된다. 하지만..

 

1,2차 왕자의 난

1398년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1382~1398)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서, 사실상 조선개국의 1등공신으로도 부족했던 이방원(정안군)이 불만을 품고 무안대군 이방번(1381~1398), 세자 이방석(1382~1398)등과 정도전일파(정도전, 남은, 심효생)등을 죽임으로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태조는 실권을 잃음과 동시에 자식들을 잃어버림으로서 큰 충격을 받아 세자 방석의 죽음으로 임명되었던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2대 정종으로 즉위케끔하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고 1400년에 정안군 이방원이 왕세자(왕세제가 되어야하지만 정종의 양자로서 세자로 책봉)로 책봉되지만 세자 책봉이전에..

1400년 회안대군(이방간, 이방원의 바로위 형, 1364~1421)이 1차 왕자의난때 노력에도 불구하고 1등 공신에 책록되지않아 불만이있던 박포(?~1400)와 함께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정안군에 의해 진압되고, 형을 죽일 수 없었던 이방원이 형을 유배보내는 차원에서 마무리짓고 이 두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서 입지가 더 굳혀진다. 이사건이후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다.

 

상왕.. 태상왕

여튼 1차 왕자의 난으로 상왕(1398~1408)으로 물러난 뒤에도 두 아들을 죽인 이방원을 인정하지 않고 동북면으로 가서 칩거하기에 이르는데, 1400년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2년이 지난 1402년에 차사를 보내 아부지 돌아와유를 권하지만 차사를 보낼때마다 죽이는 야사가 있는데 이것이 함흥차사이다. 

이후 1400년에 정종이 동생 정안대군(태종)에게 양위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나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어 7년간 더 지내다가 1408년 승하한다.

묘호는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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