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주(한국어, 프랑스어)/조선의 군주

23대 순조

Mintaka5 2024. 8. 1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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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 de Joseon, 1790~1834, 재위1800~1834

 

 

출생

1790년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에서 아버지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와 어머니 수빈 박씨(1770~1823)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문효세자(1782~1786)의 이복동생이며, 아버지 정조에 의해 1800년 1월 1일에 세자에 책봉되지만, 5달만에 아버지가 서거하면서 왕위에 오르지만 당시 10살(미성년)으로 직접통치하기엔 너무어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순조의 증조할머니)가 1803년까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아버지 정조와 사이가 좋지않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되면서 정순왕후의 세력이던 노론벽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아버지 정조때의 시파(탕평책 지지세력)를 숙청하기에 이른다.

 

천주교 탄압 시작

천주교는 정조때는 나름 온건정책을 써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자유를 보장했지만, 정조가 승하한 후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고나서는 분위기가 완전 바뀌어버린다. 정순왕후는 지지기반인 노론 벽파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강경진압에 나선다. 1801년부터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하교를 내리게되면서 그 탄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교금압(그릇된 가르침을 막아 누름)정책으로 천주교도들의 마음을 1차적으로 회유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바뀌지 않을 시 강경하게 진압하겠다고 공표하여 발생한 첫 박해가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이다.

이때 처음으로 희생된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1752~1801)가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자수하면서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된다. 이때 뿐만아니라 천주교 신자였던 수많은 대신, 백성들이 순교당한다. 그중 황사영(1775~1801)은 서강의 군대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 탄압을 막아달라는 밀서를 청나라 북경의 주교 알렉산데르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1751~1808)에게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1801)이라고 한다.

 

토사교문

정순왕후는 신유박해이후로 토사교문을 발표하는데 위정척사 이념으로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천주교를 믿지 마라는 칙령급 교서를 반포한다. 황사영 백서사건의 여파로 청나라로 보내는 사신을 대폭 감축시키고 서양문물을 접촉할 수 없도록 하는 쇄국정책을 쓰기에 이른다.

 

세도정치 시작?

숙청이후 1803년에 이상할정도로 화재가 전국각지와 궁에서 발생하고 이에 백성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궁의 대왕대비를 향해 손가락치고 궁 내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왕대비를 두고 뭐라하면서 그리고 순조의 처가 안동 김씨 일파에의해 1804년 1월에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때 순조의 나이 14세로 드디어 친정을 시작하게 된다.  

친정이 시작되게 되면서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1765~1832)이 실세로 등극하게되며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수십년간의 세도정치의 막이 오르게 된다. 노론 벽파가 시파를 숙청하고 1당체제가 된 정순왕후 수렴청정때 다시 부활하지만 정순왕후가 결국 여론악화로 물러나게되면서 사실상 1당체제였던 노론 벽파의 붕당전체가 약해지는 효과를 범하고 만다. 그래서 권력이 특정 가문에 집중되게 되면서 순조의 외척이던 안동 김씨에 자연스레 힘이 실리게 된 것.

그리고 비상대책기구로서 활약했던 비변사가 세도정치기간 권력 핵심 기구로 오르게 되면서 6조, 의정부세력역시 힘을 잃고만다. 세가 계속 커지는 안동 김씨 세력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순조는 외가쪽 가문 반남 박씨, 세자빈 가문 풍양 조씨등을 기용해 횡포를 막고자 했다.

 

홍경래의 난

1811년에 홍경래가 평안도 일대에서 평서대원수로서 백성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 지휘하여 가산(평안북도 운전)점령을 시작으로한 농민반란이다. 표면적으로는 차별과, 비변사의 본래기능 남용등의 명분이였다. 이 반란군은 다른 관군들의 저항을 받지 않고 평안북도 지역을 점령해 나가는데, 제대로 된 정비없이 점령만하다가 전열을 잡은 관군의 습격을 받아 급속도로 세력을 잃게되면서 정주성까지 후퇴하여 농성을 하기에 이른다. 농민군과 관군이 어디 상대가 되었겠는가..

물론 규모자체에서도 계속 규모가 커지는 게 아니였고 반란군 내에서도 계층이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하는 바람에 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후 농성끝에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켜 진격해들어간 관군에 의해 모두 체포되고 이 전투과정에서 홍경래는 이미 목숨을 잃는다. 나머지 주동자는 모두 처형.

 

거.. 저게 무슨 배고?

1816년부터 조선 해안가에 이양선들이 출몰하면서 혼선이 있었는데, 이때 이양선에 있던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기위해 한글,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서로 통하지 않았다고한다. 그리고 이들이 곧 영국인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이양선 선원들이 준 서적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에 알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말년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추존왕 문조, 1809~1830)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자신은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게 되지만, 1830년 효명세자가 급서해버리면서 다시 복귀하고 만다. 순조에게는 1남 4녀가 있었는데 효명세자를 포함해 순조가 승하하기전에 거의 대부분 죽고만다. 

  생몰년도 순서
효명세자 1809~1830 장남, 세자
명온공주 1810~1832 장녀
영온공주 1817~1829 차녀
복온공주 1818~1832 3녀
덕온공주 1822~1844 4녀

사실상 덕온공주를 제외한 자식들이 모두 순조가 승하하기전에 죽어버려 순조는 병을 얻고 앓다가 1834년 승하한다. 

묘호는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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