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프랑스

에두아르 마네

Mintaka5 2024. 7. 1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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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에두아르 마네,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32년 프랑스 왕국 파리10구(Le 10e arrondissement de Paris)에서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Auguste Manet, 1796~1862)와 어머니 외제니-데지레 푸흐니에(Eugénie-Désirée Fournier, 1811~1885)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 법무부 고위 공무원으로 부르주아계층이였는데, 작가들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 비서실당 또는 법무부 사무총장이였을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였다. 배경이 나쁘지 않았기에 마네는 부족함 없이 자라게 된다.

 

어린시절

소년 마네는 부지런하지 않았고 교칙은 위반하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마인드로 학교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충 이런내용이고 자세하게 사생활이 언급이 되지는 않는데, 당대 예술인으로서 사생활에대해 철저하게 지킬필요가 있었기에 언급을 일체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네는 원래 법률관련 공부를 먼저 시작했었고, 이것도 맞지 않아서 이후 해군 장교가 되고자 했었는데 실패(1848년). 실패 후 1850년, 화가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의 화방에 들어가서 6년간 훈련을 받게 됨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된다.

*고대를 주제로 작품을 그린 화가.

마네는 특히 페테르 파울 루벤스(Pierre Paul Rubens, 1577~1640)와 외젠 들라크루아(Eugé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한다. 이 두 인물은 앞으로의 그림에 영향을 미칠 거물들이다.

 

스승 토마 쿠튀르

1852년부터 유럽내 국가들에 머무르면서 시각적으로 영감을 얻는 시간들을 갖게되는데,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등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보게 된다.

마네의 스승인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는 마네와 성향자체가 다른 인물이였는데, 쿠튀르는 고전적이고 고대를 주제로하는 그림을 주로그리고 성격이 기존의 고유한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자하고 변화를 크게 주지않는 보수적 타입이였고, 마네는 독립적이고, 상당히 단순하지만 변화를 주는 스타일로서 반대적인 성향을 가져 종종 쿠튀르는 마네를 지도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856년 쿠튀르의 화방을 떠나게되면서 사실상 프리랜서 화가를선언. 1859년에 도망쳐나온이후 첫 작품 '체리를 안고 있는 아이', (L'enfant aux cerises, 1859)를 출시하게 되는데, 마네가 조수로서 고용한 15살의 아이가 있었는데, 질책을 하고 부모에게 다시 돌려보내겠다라고 말한 이후 그 아이는 마네의 작업실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해버린다. 그렇게 1년도 안된 시간만에 1860년 다른곳으로 이사한다. 

 

스페인 덕후

개인적으로 스페인을 좋아했는데, 생동감이 있고 자유로운 형태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3)의 작품을 보며 느낀 감정이라고 한다. 고야가 그렸던 방식 스페인의 전통의상을 입은 남녀, 사물에 기대있거나, 포즈를 취하는 등의 행동에 집중해서 영감을 얻게 된다.

마네는 그의 공식적인 첫 작품인 압생트(Le Buveur d'absinthe, 1859)를 살롱에서 공개하고 이 작품은 마네가 개인적으로 화가중의 화가라고 여겼던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에게 헌정하는 작품이였다.  그런데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압생트는 살롱에 공개하지만 게재를 거절당한다...!  심사위원들은 어느정도 묘사가 되어있다 싶으면 모르겠는데 작품이 이해가 되지않아서 거절했다고 한다.

마네는 이 거절의 책임은 스승 쿠튀르에게 있다고 생각을 해버리는데 게다가 이는 실제로 본인이 그렇게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이에 열받은 마네는 그래도 당대의 여러 친분있는 화가들에게 도움을 받게되어 드뎌 1861년 출품을 허가받게 된다. 마네는 압생트가 게재된 후, "이 그림을 그리면서 고야, 무리요, 벨라스케스, 쿠르베의 사실적인 묘사에 영향을 받았다"라고 언급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투우, 막시밀리안의 처형등 스페인느낌이 물씬 풍겨지는 작품들을 계속 그리게 된다.

 

종교적인 작품

종교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사실적으로 그리게 되는데, 심지어 시체를 정밀하게 그리는 작업까지 하게 된다. 보통 이전에 심사위원들에게 세속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갖춰 팅겨져나오기 일쑤인 마네였는데, 1864~1865년동안에 교회의 미신에 대한 미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심지어 더 반항적인 이미지로서 표현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교회 역사상 가장 빡세고 보수적인 교황 비오9세(Pius PP. IX, 1792~1878, 재위1846~1878)가 이 파격적인 작품을 그린 마네를 인정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물론 누구에게 욕을 듣던 무시를 당하든 인정을 받지못하든 마네는 이후로도 나는 나다 라는 마인드를 계속 고수한다.

 

여성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빅토린 루이즈 뫼랑(Victorine Louise Meurent )은 화가들의 전문 모델이였는데, 마네는 당시 18세의 뫼랑을 소녀의 모습이 아닌 여성의 모습으로 그림으로서, 피부색의 디테일, 표정등에 신경을써서 그리고 출품을 하게되는데 아주 사람들에게 난리가 난다. 

뫼랑의 전신 초상화는 (La femme au Parroquet, 1866)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마네를 공격하기에 이른다(너무 파격적이라서). 여성스러움에 집중을 한 마네였기에, 이후에 마네가 병이들던지 슬럼프가 왔었을때에 여자만 보면 일단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까지 있다.

 

정물화

'과일과 꽃만 있어도 화가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라는 말을 했었던 마네는 정물화를 아주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특히 1870년대에 들어와서 나이가 들면서 병이 들면서 부터였다. 

전통적으로 정물화를 주로그린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Baptiste-Siméon Chardin, 1699~1779)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기는데, 좀 더 실제적인 극적인 설정으로,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카메라의 해상도를 좀 더 높이는 격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하면서 시선을 좀 더 두고자 했던 것이였다.

 

말년

1879년부터 병에 시달리면서도 여러 작품을 계속해서 그린 결과, 1881년에 살롱전에서 상도받고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만, 몇년간 약해진 몸으로 말년들어 특히 정물화를 그렸던 마네였지만 1883년 51세로 매독으로 사망한다. 마네의 평생 동료인 안토닌 프루스트(Antonin Proust, 1832~1905)에 따르면 장례식 행렬엔 '화환, 꽃, 많은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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