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프랑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Mintaka5 2024. 7. 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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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르누아르,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841년 프랑스 오뜨비엔느 주 리모주(Limoges)에서 아버지 레오나르 르누아르(Léonard Renoir, 1799~1874)와 어머니 마르그리트 메를렛(Marguerite Merlet, 1807~1896)사이에서 태어남.

 

환경

가족이 매우 가난했는데, 르누아르가 3살때인 1844년 파리로 감.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생활이 개선이 되지가 않는다. 르누아르는 이곳 파리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게 됨.

13세(1857년)때 Lévy Frères & Compagnie도자기 공방(도자기 기술 훈련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일과 동시에 드로잉 저녁클래스 등에 참석하면서 기초를 쌓아가는데(1862년까지, 당시 프랑스는 1850년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모든 시스템이 바뀌고 있었음),

 

인상주의 밑거름

이 기간동안 같이 클래스에 참석해있으면서 르누아르의 재능을 지켜보던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가 정식으로 르누아르를 학생으로 받아들이게 됨. 

1861년 파리 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해서 샤를 글레이르(Charles Gleyre, 1806~1874)의 작업실에서 화가동지들을 사귀게 되는데, 그중 장 프레데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1841~1870)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등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자 인상파의 대가들이다.  이들은 파리보다는 근교 퐁텐블로(Fontainbleau)의 자연을 더 좋아해, 숲에서 서로 이젤을 들고가서 같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숲에서도 디아즈 드 라 페냐(Díaz de la Peña, 1807~1876)을 포함한 바르비종파(파리 남부 마을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그룹)화가들을 여기서 만나게 되면서 이곳에서도 자연을 화두삼아 많은 교류를 하게 된다. 사실상 인상파의 탄생이라고 봐도 될 장면, 화실에서 나와 자연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연을 그린다 이는 낮과 밤이 드러나는 외부에서 시간별로 다른 빛의 양에 따른 사물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춤추는 에스메랄다'(Danse Mon Esmeralda, 1864)로 살롱에 입성되면서 유명해진 르누아르였지만, 정작 르누아르는 색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스로 폐기해버린다. 그리고 바로직후 만들어지는 스스로의 첫 작품이자 전작과 같은1864년작인 로맹 라코의 초상화인데,  라코가문이 퐁텐블로쪽으로 휴가를 오게되면서, 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주문하면서 그려지게된 그림이다. 

이후 아예그냥 퐁텐블로 숲 근처에 집을 구매해서 사실상 르누아르집은 예술가들의 모임장소가 된다.

 

모네

르누아르는 모네와 함께 지낸적도 있는데,  이때가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인상주의가 제대로 꽃이피는 시기이기 때문. 이때부터 아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전과는 다른 터치가 다른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빛의 효과를 대비하는 방법과 그림자를 표현할때 검은색만을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상주의에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 행위. 이전세대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연구하여 색상효과기법을 터득한 시기도 이때이다. 

모네는 풍경화를 선호하고, 르누아르는 인물화를 선호. 종종 둘이 나란히 그림을 그리면서 같은 주제의 그림(풍경+인물)을 그렸고, 가끔 가족구성원을 모델로 삼아 그리기도 했음. 

 

보불전쟁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사이에 전쟁(보불전쟁)이 터지게 되면서 르누아르도 전쟁에 동원되면서 전투에 투입되게 되지만, 중병에 걸리면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871년 전역을 하고 다시 오게된다. 이 전쟁상황에서도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군인이 르누아르가 속한 부대의 사령관의 아내인 마리-옥타비 베르니에(Marie-Octavie Bernier, 1838~1920)의 초상화를 그리게 됨

 

후원자들

빅토르 쇼케 초상화(1876), 출처-위키피디아

이후 여러 전시회에 출품, 작품을 홍보하기위해 경매를 조직하는등 다방면의 노력을 거치는데, 이때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행위를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이는등의 마찰이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미술작품 수집가이자 세관원 빅토르 쇼케(Victor Chocquet, 1821~1891)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빅토르를 중심으로 미술작품 컬렉션이 구축되면서 프랑스 내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이게되면서 화파가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러나 1870년대말 점점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떨어지고 그림판매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솔로활동을 하게되는데, 되게 심플하게 작품은 하나만 전시해놓는등 이때 적지않은 방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1878), 출처-위키피디아

그다음 후원자인 샤르팡티에(Charpentiers)가문의 지원을 받게되는데, 그계기는 1878년 마르그리트 샤르팡티에 부인(Marguerite Charpentier, 1848~1904) 과 아이들의 초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난 이후였다. 사교계에 많은 인맥을 두고있던 샤르팡티에 부인은 문학 살롱등을 주최하고 그 살롱에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소개시켜주면서 르누아르의 자존심을 치켜세워주게 됨.

 

이탈리아

1881년 이탈리아에 가서 체류하게 되면서 라파엘의 작품등을 공부하면서 색채가 좀더 진해지고 인물의 윤곽이 더 명확하고 뚜렷해지는 등의 기법을 터득하게되면서 앵그르시대(신고전주의)에 편승하게 됨. 82년 복귀후 이전과는 다른 작품스타일을 추구하게되면서 인상주의와 신고전주의가 공존하는 시기가 10년넘게 지속된다.

 

말년과 사망

1903년 62세의 르누아르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남부 니스(Nice)근처 꺄니으 슈흐 메흐(Cagnes-sur-Mer)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곳이 르누아르가 죽을때까지 살게되는 지역이다. 지중해가 바로앞에 보이는 집에 머물면서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캔버스와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지만, 1905년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이 심해짐과 동시에 걷지도 못하게 되면서 휠체어 앉아있게 되지만 작품활동은 계속 한다. 

1915년 아내 알린 샤르고(Aline Charigot, 1859~1915)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두 아들 피에르와 장은 1차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해서 부상을 입지만 살아서돌아옴. 1919년 마지막으로 작품을 검토하러 파리 루브르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폐부종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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