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출생
1840년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Paris)9구(le neuvième arrondissement)에서 아버지 클로드 아돌프 모네(Claude Adolphe Monet, 1800~1871)와 어머니 루이즈 저스틴 오브리 모네(Louise Justine Aubrée Monet, 1805~1857)사이에서 태어남.
1841년 초 노트르담 드 로레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음. 부모님모두 파리출신에 1800년초에 조부모가 파리로 정착을 해서 살고있는 파리 토박이. 그러나 아버지 아돌프 모네가 1845년 재정적으로 위태로워지면서, 가족모두가 노르망디내 르아브르로 이주를 하게 된다.
학창시절과 위기
르아브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클로드에게 친구들은 '매우 동정적이고 친화적인 성격을 가진 친구' 라고 표현을 하였음. 이곳에 온뒤에 그림의 기초를 다지는데, 주로 학교 내 교사나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여백을 장식하는데 사실상 풍경과 촛상화 모두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857년 어머니 루이즈가 사망하면서 충격에 빠진 클로드는 학업을 포기해버리면서 이를 걱정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취미로 그림을 그려왔던 이모 잔-마르그리트 르카르드(Jeanne-Marguerite Lecadre, 1790~1870)은 조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격려를 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게 된다. 마침 이때 판매한 그림의 주인의 동료가 풍경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인데 부댕역시 풍경화가였어서 모네는 부댕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예술적으로 첫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후에 클로드는 외젠에게, "내가 만일 화가가 된다면, 내가 빚진 사람은 외젠 부댕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데뷔
그리하여 1858년 여름에 첫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해 가을에 르아브르에서 열린 전시회에 풍경화들중 두 점을 선보이면서 사실상 데뷔를 하게되는데, 부댕의 영향을 받아 나름 전시회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를 마치게 되는데, 이후 부댕이 전시회 후에 클로드에게 파리에 가서 수업을 듣는게 어떠냐고 조언을 한다.
그 조언을 받들어 1859년 초 파리에 도착한 클로드는 이모 르카르드의 친구였던 아트망 고티에(Amand Gautier, 1825~1894)의 환영을 받으면서, 이들의 지원을 통해 정기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게 된다. 아버지 아돌프 역시도 르아브르시에 아들의 장학금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해버려서 사실상 파리에서의 지원이 다였지만 그래도 부족한 정도는 아니여서 나름 살아간다.
1860년, 스위스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이때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많이 받게되고 여러 미래의 동료화가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군입대
1861년 3월 클로드는 르아브르에서 무작위로 징집되면서 군대에 끌려가는데, 면제비용 2500프랑을 내면 안갈수도 있었지만, 가족이 떠안을 부담을 생각해 군대에 들어가서 아프리카대륙 알제리에 주둔하게 되는데, (운이좋은건가)1862년 초에 장티푸스에 걸려 다행히도 휴가를 받아 르아브르로 오게 되는데, 이모 르카르드는 클로드가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듣는다는 조건으로 면제비용을 지불하기에 이른다.
전역하고 다시 르아브르로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듣지만, 전통적인 화풍의 수업내용에 지루함을 느낀 클로드는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1862년 파리의 제국 미술 학교(에꼴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 제국이 붙은건 저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3세 황제의 제정시대였어서 이름붙여짐) 에서 미술 수업을 듣기 시작하지만, 스승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 1806~1874)와 의견이 맞지가 않아 또 탈출(글레르는 골동품, 소품등의 정물화쪽의 배경을 선호하였고, 클로드는 자연 형태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것을 선호하였음)하였다.
그래도 스승 글레르는 떠나는 클로드에게 ''우리가 인물을 만들 때 항상 골동품을 고려해야하는 것을 잊지말게''라고 말하고 보낸다. 이 때 글레르의 화방에서 떠난 동료로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가 포함되어있었는데 1863년 봄에 다같이 떠난다(사실상 탈출).
작업실 밖으로
1863년 동료들과의 탈출? 이후 클로드는 일단 먹고살아야하니 루브르박물관의 카피리스트(사본을 만드는 사람)로 취직을 하게 되는데, 일 외적인 시간에는 프레데릭 바지유, 르누아르와 함께 바르비종(Barbizon)근처 숲에 가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이 될줄은 그들은 알았을까?
카미유 동시외
1866년 미래의 아내가 되는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 1847~1879)를 그림의 모델로서 만나게 되는데, 당장에 살롱에 전시해야할 작품이 딱히 없던 클로드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하게 되는데(초록 드레스의 여인, La femme en robe verte, 1866), 이 작품은 살롱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추가로 1864년부터 앞서말한 두 동료(바지유, 르누아르)와 함께 그렸던 퐁텐블로(Fontainbleau)숲을 표현한 풍경화를 같이 전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작품은 근본적으로 연관성이 없는 독립된 장르의 작품들이였는데 이걸 하나로 엮으려고 했던 클로드의 욕심으로 1867년 살롱 심사위원단에게 작품 게시를 거절당하고, 이때부터 다른 예술가들의 요청또한 점점 사라지게 되면서 금전적으로 어려운상황에 빠지게 된다.
하필 이때는 카미유가 임신중이였는데, 하도 어려워진 상황에 가족들이 있는 르아브르로 돌아가서 8월전까지 머무르게 됨. 이후 다시 파리로돌아와서 아들 장 모네(Jean Monet, 1867~1914)를 낳게 됨. 아이까지 생긴마당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면서 그림판매를 시도하고 살롱에 출품의뢰를 하지만 쉽지만은 않아서, 당장에 필요한 금전은 바지유나 르누아르등에게 빌려서 쓴다. 1869년 클로드의 식구는 일드프랑스 부지발(Bugival)에 정착하면서 르누아르와 함께 인상주의 회화 기법을 발명하게 되면서 여러 살롱에 출품을 시도하지만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1870년 연인 카미유와 결혼한다.
보불전쟁
1870년 7월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보불전쟁, 1870~1871)이 터지게 되면서 모네는 동료들과 같이 군대에 징집되는데, 1870년 후반 전쟁이 한창일때 프레데릭 바지유가 전사해버린다. 이후 군복무를 원치않아 전역을 하고 런던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풍경화가로 이미 유명했던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의 작품을 보게되는데, 빛을 다루는 방법 중에서도 특히 런던 템스강의 안개를 표현한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으며 영감을 얻는다.
이번 영국 체류는 8개월정도였는데 단6개의 작품을 그리지만 이때 무일푼으로 아내와함께 우울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림에 고이 담겨있다. 영국 체류중이였던 1871년 아버지 아돌프 모네가 사망하는데, 전쟁을 피해서 도망쳐나와 사실상 애국적 의무를 회피한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을까하는 두려움으로, 프랑스에 가지도 못하고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도 하지 않았다.
인상파 용어 첫등장
그렇게 1871년 12월쯤이나 되어야 파리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산과 아내의 결혼지참금 덕분에 나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어졌던 것 같다. 이후 1872년,73년에는 동료 화가들과함께 이전과같이 그림을 그리고 그림 판매도 나름 잘 되어 나쁘진 않았지만, 1874년 처음 열리는 인상파 화가전시회가 열리면서 클로드도 자신이 살았었던 르아브르 항구의 풍경, 떠오르는 태양등 현재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출품되지만, 개막 한달동안 3500여명의 관객에 그쳤고 많은 비평가와 언론인들이 적대적으로 달려들면서 주최 회사측은 파산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이후에 언론에 게재된 리뷰에서 인상파라는 용어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안타까운 사건에 처음 쓰이게 된다.
그러나 포기하지않고 클로드는 1876년 1회장소와 똑같은 장소에서 열린 두번째 전시회에서는 비판이 개선되고 칭찬이 쏟아져나오게 되고(전화위복), 1877년에 열린 전시회에서는 아예 비판이 사라지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한탄스럽게도 1879년 아내 카미유가 사망해버리면서 또다시 절망에 빠지고 만다.
아내가 죽은후 1880년 혹독한 파리의 겨울 센강을 그린[La Débâcle ou Les Glaçons, '센강위의 얼음']이라는 작품에서 클로드의 절망을 볼 수 있다.
롤러코스터
1880년부터 1890년까지 클로드는 마치 롤러코스터와같이 전시회에서 비록 크진않지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 1890년에 4차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식에 자신의 그림 세점을 전시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출장도 잦아지고 이후 방송까지 하게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된다. 1891년에는 파리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모네를 위한 전시회, 1894년 28개의 대성당을 주제로 한 캔버스작품, 1895년 전시회등까지.. 이후에는 더 평온하게 센강에서 그림을 그리는등 앞선 암흑기보다는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인다.
1900년대 이후 사망까지
1900년부터 클로드는 자연, 정원, 수련꽃, 연못, 다리등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연말에 클로드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는데 수련꽃이 있는 연못에관련된 10가지 종류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이와 동일한 전시회를 1901년 뉴욕에서 열게되는데, 대성공을 거둔다. 이후 1903년, 1908년역시 전시회에 성공하게 된다.
1910년대부터는 70대에 접어들면서 고령으로인해 백내장등으로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데, 1919년 친구 르누아르도 사망해버린다. 이후 시력이 더 나빠져서 주변에서 수술을 권유하지만 거부한다. 모네는 완강한 거부를 하다가1923년에 눈 수술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활동에도 매진한다(당시83세).
계속된 작업으로 인해 1926년 폐암에 걸려 고통받다가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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