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튜더 왕조

메리1세

Mintaka5 2024. 6. 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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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Ire ' Marie la Sanglante '(1516~1558, 재위1553~1558)

메리1세

출생

1516년, 잉글랜드 그리니치 플라센시아 궁(Palais de Placentia)에서 아버지 헨리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1509~1547)와 어머니 카트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사이에서 둘째(장녀)로 태어남. 

 

버려진 모녀

헨리8세가 메리와 카트린 다라곤을 처음부터 싫어하지는 않았다. 물론 안 불린(영어:앤 볼레인,  Anne Boleyn, 1501~1536)을 만나기 전까지.. 

이후 안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 카트린과의 긴 혼인무효 소송과정중 메리가 어머니편을 들면서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고, 이후 헨리8세가 그냥 내치고 재혼을 함. 이과정에서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해버리면서 완전 버린자식이 되어버림. 결국 최종적인 이유는 아들이 없어서.

근데 이후 안 불린도 엘리자베스 공주(미래의 엘리자베스1세, Élisabeth Ire, 1533~1603, 재위1558~1603)를 낳고 계속 유산해버려서 헨리8세가 별 죄목을 씌워서 처형. 메리와 똑같은 처지가 됨.

 

대모

앤 불린이 처형당하고, 헨리8세는 3번째 부인 잔느 시무흐(영어:제인 시모어, Jeanne Seymour, 1508~1537)사이에서 드디어 아들 에드워드6세(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을 낳아 기뻐하는데 잔느가 산욕열로 사망. 그래도 메리를 아껴주었던 잔느가 죽자 메리는 크게 슬퍼하고, 이복남동생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어 보살피게 됨.

 

동생아 니까지 왜... 사촌아 헬프

비정한 아버지 헨리8세가 1547년 서거한 이후 이복동생 에드워드6세(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가 즉위하며 한숨 좀 돌리나 싶은데, 에드워드또한 카톨릭 교도인 메리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누나가 본인의 종교정책에 따르지 않는다고, 아주그냥 면전에 대놓고 질책하기까지 함.  그래서 빡이친 메리는 한때 메리의 약혼자이기도 하면서 사촌(?!)인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에게 잉글랜드 카톨릭 탄압에 대해 헬프를 요청하게 됨. 그러나 재위말년의 카를5세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카를5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1세(Ferdinand I, 1503~1564, 재위1556~1564)가 사실상 통치를 이어나갔기에 크게 효력은 없었다.

 

제인 그레이

1553년 에드워드6세가 후사없이 병들어 일찍 서거하자, 당연히 다음 잉글랜드의 왕위는 메리의 것이였는데, 의회가 카톨릭교도인 메리가 오르는 것을 막기위해, 족보를 타고올라가 메리와 이름이 같은 헨리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Mary Tudor, 1496~1533)의 손녀인 제인 그레이(프랑스어:잔느 그레이, Jeanne Grey, 1537~1554, 재위1553)를 여왕으로 계승하고자 선언을 해버린다...!

이후 메리를 제거하기위한 음모에 들어가지만, 사전에 미리 경고받은 메리가 다행이 피해가고 세력을 규합해 제인그레이 세력들을 축출하고 런던에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와 입성하게 됨. 의회측에서는 죽이려하는 제인그레이를 메리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으나,  이후 처형됨.

 

영국역사 최초의 여왕

드디어 메리가 메리1세(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로서 즉위를 하는데 카톨릭측근들을 기용하고, 석방시키면서 여론이 점차 메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미 의식하고있던 메리는 이전에 잡아들인 제인그레이 세력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고, 석방시키면서 여론을 달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안정적으로 대처하여 무사히 대관식을 치룰 수 있게 된다.

근데 한가지 문제점은, 아버지 헨리8세 통치시기 때 들어오던 혼사가 메리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끊기게 된 것인데, 즉위당시 37살이라는 나이에도 미혼인 메리라서, 이대로라면 동생 엘리자베스(미래의 엘리자베스1세)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으니 꼭 자녀를 낳아 명목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생각이 많았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 달링..!

이전에 메리가 어린시절 카를5세와 약혼했다는 글귀를 봤을것이다. 카를5세는 메리의 사촌이였는데(카를5세의 어머니와 메리1세의 어머니가 자매), 심지어 결혼상대가 카를5세의 아들 펠리페2세(메리1세의 조카)였던 것. 즉시 잉글랜드는 난리가 난다. 왜?

스페인은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였으므로,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가 메리1세와 결혼하게되면 잉글랜드또한 카톨릭국가로 회귀할 것이라느 여론 때문. 심지어 카를5세의 아들이였기에,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에 흡수통일될수도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 

여튼 여차저차 결혼을 하게 되고, 반대의 목소리는 여전했고 오히려 더 커졌다.

 

피의메리

반대의 목소리는 골수지지층까지 반발하게되며 잉글랜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외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후 반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와이엇의 난이라는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에올리고 메리를 폐위시키겠다는 어마무시한 난이다. 이결과로 메리는 진압에 성공하지만, 신교도 300명을 화형시키게 되면서(물론 더 많음) 이때부터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남편 펠리페2세는 사실상 사랑으로 한 결혼이 아니라서(자신은 잉글랜드에 있지않으면서, 필요할때만 메리를 찾음)사실상 메리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외국인이 여왕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에 공직에도 앉을 수 없었음. 뭐 펠리페는 이미 스페인의 군주였기에, 스페인에 이익이 되는 일만 생각하여 결혼을 잘 활용함. 

사실상 결혼한 부부관계보단 동군연합관계의 부부관계에 가까워, 스페인의 일이있으면 메리가 지지를하고 더욱이 잉글랜드의 이익도 나지않는데, 세금을 더 올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함. 그리고 펠리페2세까지 메리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 

 

서거

결국 남편에게도 버림받고 민심도 외면받는 메리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1558년, 조용히 서거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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