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lisabeth Ier, 1533~1603, 재위1558~1603
출생
1533년 잉글랜드 왕국 그리니치 플라센티아 성(Greenwich, Palais de Placentia)에서 아버지 헨리8세(Henri VIII, 1491~1547, 재위1509~1547)와 어머니 헨리8세 둘째부인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한 튜더왕조의 마지막 군주. 중간정도의 국력을 가진 잉글랜드를 당대의 강대국 스페인과의 전쟁이후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며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식민지 확장정책을 실시, 엘리자베스1세 자체적인 검소한 생활로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왕권까지 강화되면서 45년의 재위기간동안 강력한 왕권을 자랑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 처녀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초년
이복 언니 메리(미래의 메리1세)가 1516년 태어난 이후 아버지 헨리8세의 첫째부인 카트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이 폐경에 다다르면서 안그래도 정략결혼으로 금슬도 좋지않았던 탓에 이혼을 결심하고 엘리자베스1세의 어머니가되는 앤 불린(당시 카트린 다라곤의 시녀)과 결혼하기위해 교황청에 이혼 청원을 넣지만 당시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가 거부하게 되면서 헨리8세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직접 스스로 잉글랜드 성공회의 교회 우두머리가 되면서까지 이혼을 강행하고 앤 불린과 재혼한다.
이렇게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 공주(엘리자베스1세)인데, 아들을 원했던 헨리8세로서는 실망하지만 아직 다음 출산의 희망이 있던 기대가 있었지만, 이후에 유산과 임신을 반복하게되면서 결국 엘리자베스 공주 한명만 살아남게되면서 헨리8세는 마침 잘못 걸린 앤 불린의 남동생 조지불린등이 간통과 반역, 근친상간등의 혐의를 씌워 1536년 앤 불린을 처형하게된다.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 나이 3세. 앤 불린이 처형당하면서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1508~1537)와 재혼하면서 엘리자베스 공주의 왕녀지위와 계승권이 박탈됨. 엘리자베스 공주는 미래의 헨리8세의 여섯번째 부인이되는 카트린 파(Catherine Parr, 1512~1548)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아부지 인생도 기구하네..
그러나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도 헨리8세가 드디어 고대하던 첫 아들 에드워드(미래의 에드워드6세)를 낳지만 산욕열로 1537년 사망해버리면서 다시.. 독신... 아버지 헨리8세의 6명의 부인에 대한 표를 만들어 놓을테니 참고.
이름 | 생몰년도 | 자녀 | 기타 | |
1 | 카트린 다라곤 Catherine d'Aragon |
1485~1536 | 장남-헨리튜더 Henri Tudor, 1511~1511 차녀-메리1세 Mary Ier, 1516~1558, 재위1553~1558 |
이혼 |
2 | 앤 불린 Anne Boulin |
1501~1536 | 엘리자베스1세 Élisabeth Ier, 1533~1603, 재위1558~1603 |
처형 |
3 |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
1508~1537 | 에드워드6세 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 |
출산후 산욕열로 사망 |
4 | 앤 클레페 Anne de Clèves |
X | 초상화와 다른 실제모습으로이혼 | |
5 | 카트린 하워드 Catherine Howard |
1523~1542 | X | 2명의 남자와 불륜으로 인한처형 |
6 | 카트린 파 Cahterine Parr |
1512~1548 | X | 헨리8세보다 1년더 살음 |
아버지 승하 이후
I. 토머스 시모어
아버지 헨리8세 승하이후 여섯번째 부인 카트린 파는 남편 헨리8세의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의 친오빠인 토마스 시모어(Thomas Seymour, 1509~1549)와 재혼하게 되면서 엘리자베스 공주까지 같이 살게 되는데, 토머스가 엘리자베스 공주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고자 당시14살밖에 되지않았지만 왕위계승권을 가졌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추근대는 일을 카트린 파가 눈치채면서 엘리자베스 공주를 다른곳으로 보내면서 일단은 일단락 된다.
그러나 1548년 토머스 시모어의 아이를 임신했던 카트린 파가 산욕열로 사망하면서 다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접근해서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1549년 참수당한다.
II. 제인 그레이
1547년 아버지 헨리8세가 승하하고 남동생이였던 에드워드가 에드워드6세로서 즉위하게 되는데, 워낙 어릴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에드워드가 재위한지 6년밖에 되지 않은 1553년 사망하면서 왕의 유언장에 따라 원래는 다음 왕위는 메리에게로 갔어야 했는데 계승법이 무시되고 방계가문인 제인 그레이(Jane Grey, 1537~1554, 재위1553, 9일재위)가 후계자가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제인 그레이는 당시 실세 대신인 섭정 존 더들리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면서 사실상 존 더들리가 자기가 왕권을 잡고 흔들겠다는야욕을 보이면서 메리를 축출하기위해 런던으로 부르고자하지만 내부자의 밀고와 명분 부족(메리는 카톨릭 신자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 안된다는 명분을 가졌던 더들리의 주장은 둘째 엘리자베스 공주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그 명분에 부합하지 않는다)으로 추밀원 관리들이 제인 그레이의 지지를 철회(제인 그레이의 9일천하)하고 메리를 받들면서 메리가 입성하게 된다.
존 더들리는 물론 반역으로 인해 바로 처형되고 메리 공주가 메리1세(Mary Ier, 1516~1558, 재위1553~1558)로 즉위하게 된다. 제인 그레이는 런던탑에 구금되어있다가 1554년 참수(메리가 참수하고자 했던 것이 아님).
III. 메리1세
1553년 이복언니 메리1세가 즉위하고 카톨릭 국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개신교 국가였던 잉글랜드 국민들의 민심이 들끓기 시작하는데, 거기다 더해 메리1세가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펠리페2세(Felipe II, 1527~1598, 재위1556~1598)와 결혼하게 되면서 더욱 불신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메리는 반대자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참수하는등 수백명이 목숨을 잃게되면서 이때 블러드 메리라는 칭호가 붙게 된다.
메리는 심지어 동생 엘리자베스 공주가 이들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해 연금해둔다.
메리는 별다른 업적없이 1558년 병에 걸려 죽기 전에 엘리자베스 공주를 후계자로 인정하게 되면서 엘리자베스 공주가 후임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1558년 이복언니 메리1세의 사망으로 엘리자베스공주가 엘리자베스1세로 즉위하게 된다. 언니 메리에 의해 카톨릭국가가 될뻔한 잉글랜드를 다시 개신교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 내치와 외치 모두 집중하게 된다.
I. 메리 스튜어트
적국이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1세인 메리 스튜어트(Mary Ier, 1542~1587, 재위1542~1567)는 엘리자베스1세와 친척이였는데(엘리자베스1세의 큰이모 마거릿 튜더의 외손녀가 메리 스튜어트)혼인을 하지않고 자식이 없던 본인이 죽을 시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계승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인척이였지만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남편 프랑스 왕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가 1560년 사망하고 귀국함과 동시에 카톨릭 신자(프랑스의 국교는 카톨릭)가 되어있던 메리 스튜어트를 더욱 경계하게 되는데..
1567년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서로 사이가 좋지않았던 메리1세의 남편이였던 단리 경이 음모끝에 살해되는데 배후에 메리1세가 있었고, 남편 살해 후 바로 재혼하게되면서 반란이 일어남)메리1세는 아들 제임스(제임스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68년 스코틀랜드를 탈출해 잉글랜드로 망명.
그러나 어떻게 처분해야할지 고심하던 엘리자베스1세가 메리1세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19년동안 연금을 시킨다..(1568~1587)항상 감시를 받고있던 메리1세는 엘리자베스1세의 간자에게 속아 반역의 뜻이 담긴 서신을 간자에게 건네버리면서 명분을 얻은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1세를 재판에 회부해 1587년 참수시킨다.
II. 프란시스 드레이크
엘리자베스1세의 최측근이 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는 1570~1580년대 당시 잉글랜드의 적국이던 스페인 선박을 약탈하는 해적으로 이름나 있었는데, 마침 골칫거리였던 스페인을 괴롭혀주는 드레이크를 엘리자베스1세는 공로를 인정해줘 기사작위까지 내려준다. 이는 스페인에서 사신들이 해적에 대한 항의를 하러 올때 반드시 처벌하라고 했던 것과는 다른행보.
엘리자베스1세 입장에서는 적국 스페인 선박을 약탈해 금을 얻어와 군주에게 바쳐주는 드레이크를 아낄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약탈이 극에 달하면서 스페인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러 오지만 오히려 사신이 보는 앞에서 드레이크를 잉글랜드 해군 중장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스페인에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자랑하며 바다를 제패하고 있었는데, 드레이크는 해군 부사령관에 임명됨(사령관 하워드 제독)과 동시에 작전에 들어가 1587년 아르마다 함대가 정박해있던 카디스 만에서 화공으로 큰 손실을 내게 하는데, 그럼에도 스페인은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코앞까지 쳐들어오는데.. 1588년 칼레 앞바다에서 화공전술을 써 스페인함대 대부분을 궤멸시키면서 승리하지만 당시 사령관의 명을 듣지않고 드레이크는 약탈에만 집중하여 사령관은 드레이크를 보직해임하지만... 드레이크는 약탈한 금을 엘리자베스1세에게 바치면서 오히려 더욱 신임을 받게 된다(돈 가져오는데 싫어할 사람 어딧나..?).
말년
엘리자베스1세는 나이가 70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평점심을 잃고 판단능력이 떨어짐에 따라 위기감이 고조되는데 이는 나이70에 다달을때 까지 혼인을 하지않고 자식이 없었던 것.. 사실상 엘리자베스1세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는 말이..
1602년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6세(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에게 후계지명을 하면서 본인은 1603년 사망. 후사 없이 사망해서 절대왕정 튜더 왕조가 끊기고 제임스6세가 잉글랜드 제임스1세(Jacques Ier, 1566~1625, 스코틀랜드재위1567~1625, 잉글랜드재위1603~1625)가 즉위하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1603~1714)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