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군주(927~1707), 고위귀족/튜더 왕조

헨리8세

Mintaka5 2024. 8. 1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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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8세(Henri VIII d'Angleterre, 1491~1547, 재위1509~1547)

헨리8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491년 잉글랜드 그리니치(Greenwich) 플라센티아 궁(Palais de Placentia)에서 아버지 헨리7세(Henri VII, 1457~1509, 재위1485~1509)와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Élisabeth d'York, 1466~1503)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다.

 

배경

헨리8세가 태어났을 1490년대는 잉글랜드에서 30년간 벌어진 장미전쟁(La guerre des Deux-Roses, 1455~1485)이 아버지 헨리7세쪽 파인 랭커스터가가 승리를 거둬 아버지가 튜더왕조를 연지 5여년정도 되었을 시점이였다. 잉글랜드의 튜더왕조(1485~1603)는 왕권이 하늘을 찌를만큼 아주 강했던 시기로서 그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등이 있는데 이번글의 주인공은 헨리8세로서, 1500년대유럽 상남자시대를 대표하는 군주로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든 군주이며 현재까지도 6명의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왕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캐서린 다라곤

헨리8세의 친형인 아서 튜더(Arthur Tudor, 1486~1502)가 16세로 요절해버리면서 사실상 헨리8세가 계승자가된다. 형에게는 결혼하기로 되어있는 스페인 여인이 있었는데 아서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버지 헨리7세의 뜻에 따라 헨리8세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여인이 헨리8세의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이다. 그리고 1509년 부왕 헨리7세가 서거하면서 헨리8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받게되면서 카트린 역시 왕비가 된다.

헨리와 캐서린은 결혼 초기엔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둘 사이에 낳은 첫 아들은 태어난지 한달만에 사망하고 딸 메리(메리1세)를 낳은뒤 임신, 유산을 반복하다 캐서린이 폐경을 맞아버리고 난 후 사이가 나빠지는데,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8세는 임신가능한 젊은 여성과 재혼하기를 원했지만 잉글랜드는 당시 카톨릭국가로서 배우자가 사망하기전까지 재혼은 불가했고, 헨리8세는 이혼을 하기위해 별에별 이유를 들어 주장을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받아주지 않게되면서 한가지 수를 쓰게 된다. 

 

국교회 수장

교황청에서 이혼을 받아주지 않자, 1534년 헨리8세는 수장령(L'Acte de suprématie, 1534)을 선포해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며 카톨릭에서 분리 독립을 강행하면서까지 캐서린과 이혼을 하게 된다. 이에 열받은 교황 클레멘스7세(Clemens PP. VII, 1478~1534, 재위1523~1534)가 헨리8세를 파문함으로 맞대응하게 된다. 이때 잉글랜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장령에 반대를 하는데 헨리8세는 이 반대자들을 처형하며 강경대응하게 되는데 이때당시 처형된 사람중엔 잉글랜드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도 있었다. 캐서린과의 이혼으로인해 메리 공주는 서녀로 강등되고 만다.

 

둘째부인 앤 불린

1534년 헨리8세가 이혼하기 전1532년부터 카트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yen, 1501~1536)과 이미 비밀리에 결혼해 1533년 딸 엘리자베스 공주(미래의 엘리자베스1세,  Élisabeth Ier, 1533~1603, 재위1558~1603)를 낳게 되어 기다렸던 아들이 아니라 실망하여, 헨리8세는 다른 정부를 두어 앤 불린이 점점 불안해하면서 헨리8세를 쪼으기 시작하는데 그럼에도 헨리8세는 대신들과 앤과 파혼하고자 하는 논의를 하지만, 이후 1536년 둘째를 임신한 앤 불린이 헨리8세가 낙마사고로 부상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이에 헨리8세는 앤 불린의 동생 존 불린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씌워 존 불린을 처형하고, 이 사건으로 결혼이 무효라고 선포하고 앤 불린역시 근친상간 혐의로 런던탑에서 처형된다. 앤 불린 사이에서 낳은 딸 엘리자베스 공주역시 언니인 메리 공주와 같이 서녀로 강등된다. 

 

셋째부인 제인 시모어

에드워드6세의 어머니로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1508~1537)는 이미 1534년 앤 불린이 둘째를 유산하면서부터 정부로 삼았던 여인인데, 1536년 앤 불린이 처형된 직후 헨리8세와 결혼하게 된다. 1537년 헨리8세가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미래의 에드워드6세, 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를 낳게 되지만 제인은 산욕열로 출산10일만에 사망하고 만다.

 

넷째부인 앤 클레페

4번째 부인은 당시 카를5세(Charles Quint, 1500~1558, 재위1519~1556)의 패권시기로서 외교적인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클레페 가문의 앤(Anne de Clèves, 1515~1557)과의 만남을 신하들이 주선하게 된다. 먼저 초상화를 제작해 헨리8세에게 보여줬을 땐 헨리8세가 만족했는데, 그녀가 잉글랜드로 와서 만나니 그녀의 실제모습이 그림과 많이 달랐던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사기). 그래서 헨리8세느 결혼을 무효로 할려했지만, 결혼을 무효로 하고 쫓아내면 앤을 적으로 돌릴 수 있었기에 일단은 연금을 주면서 잉글랜드에 편하게 살게끔 하고 다음 처자를 물색하러 간다.

 

다섯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

헨리8세는 1540년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 1523~1542)와 다섯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1491년생인 헨리8세와는 32살차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에 불과했다. 젊은 여왕을 맞이한 헨리8세는 많은 재물을 카트린에게 주며 마음을 표현하지만, 젊은피에 외모까지 수려한 캐서린은 이미 여러 남성과 얽혀있었고 32살연상인 아저씨같은 헨리8세에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은 듯 하다. 

캐서린의 내연남은 두명이였는데, 그녀는 토머스 컬페퍼(Thomas Culpeper, 1514~1541)와 프란시스 더러햄(Francis Dereham, 1500~1541)과 불륜관계를 맺으며 궁에서 밀애를 즐기다가 헨리8세의 신하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면서 이후 헨리8세는 캐서린 하워드를 포함한 두 내연남 토머스와 프란시스까지 3명모두 처형하게끔 한다.

 

여섯번째 부인 캐서린 파

헨리8세는 1542년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하고 1543년 6번째 왕비인 귀족가 출신 캐서린 파(Catherine Parr, 1512~1548)를 여섯번째 왕비로 맞게 된다. 헨리8세의 마지막 왕비로서 서녀로 강등되었던 두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헨리8세에게 화해를 하라고 권하는 등 왕실을 안정시키는데 나름 애쓴 왕비로 그녀는 헨리8세의 자녀들을 스스로 돌봄으로서 헨리8세의 마음까지 바꿔놓는데, 1544년 왕위계승법을 개정해 아들 에드워드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계승을 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하게 한다. 캐서린 파는 남편 헨리8세 서거후 두번째 남편사이에서 가진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열로 사망한다.

 

서거

헨리8세는 즉위한 지 38년이 지난 1547년 56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후임 왕으로는 1544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장남 에드워드가 에드워드6세로서 승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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