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
출생
1537년 잉글랜드 런던 햄프턴 코트 성에서 아버지 헨리8세(Henri VIII, 1491~1547, 재위1509~1547)와 어머니 제인 시모어(Jeanne Seymour, 1508~1537)사이에서 태어남.
배경
에드워드의 어머니 제인 시모어는 헨리8세의 3번째 부인이였는데, 첫번째 부인 캐서린 다라곤(Catherine d'Aragon, 1485~1536)은 딸 메리(메리1세, 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를 낳고 폐경기를 맞으면서 자녀를 더이상 낳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여 그 책임을 캐서린에게 지면서 이혼, 둘째부인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다.
그렇게 셋째부인인 어머니 제인 시모어가 아들 에드워드를 낳으면서 헨리8세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왕국 전역에 그토록 기다려온 상속자의 탄생을 기쁨과 안도감으로 맞이하고(모두 흥분중), 에드워드가 태어난지 3일만에 성공회 세례를 받게되면서 장녀 메리를 에드워드의 대모로 삼게 되고, 작위들을 받는다. 그러나, 어머니 제인 시모어가 출산 후 합병증으로 인해 10일만에 사망해버린다..
에드워드 왕자는 잘 먹고 나름 건강하게 자라면서 헨리8세가 나름 만족하고 있었는데, 1541년 에드워드가 4살일때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할 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살아나지만 이후 몸이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버린다. 6살부터는 후계자 교육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분야별로 교사를 두어 언어, 과학, 철학, 수학, 음악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가르침을 받는다.
메리 스튜어트
1543년 헨리8세는 스코틀랜드와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는데[1살의 메리 스튜어트의 섭정대신이던 제임스 해밀턴(Jacques Hamilton, 1516~1575)과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사이 평화 구축과 메리 스튜어트와 에드워드6세가 결혼할 것을 약속한 조약]에드워드6세도 6살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1살이였다(7개월). 여튼 이 조약으로 나름 평화를 이루어낸다.
물론 이후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관계기간을 연장함으로서 빡친 헨리8세가 1544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라고 명령하게 되면서, 이후 헨리8세가 죽고나서도 전쟁이 지속된다. 이 전쟁은 오늘날 거친 구애(Rough Wooing)라고 불린다.
즉위
1547년 아버지 헨리8세(Henri VIII, 1491~1547, 재위1509~1547)가 56세의 나이로 서거하면서 에드워드가 에드워드6세( Édouard VI, 1537~1553, 재위1547~1553)로서 즉위하게 되는데, 주변 신하들과 종교인들은 에드워드에게 잉글랜드 교회(성공회)의 개혁을 계속 하여 로마 주교들을 몽땅 추방하고 그 흔적을 제거함으로서 성공회의 지속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헨리8세는 아직 나이가 어린 아들 에드워드가 18세(1555년)가 될때까지 주변에서 업무를 도와줄 인물 16명을 지명한다는 유언장을 쓰고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언장 안에는 누가 그들의 대장인가라는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에드워드의 측근이자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Édouard Seymour, 1506~1552)는 유언장을 받들면서 한편으로, 자기의 지지기반을 만들기위해 언급된 인물16명중 자기편을 추려 지지를 확보하고자 시도를 한다.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는 섭정대신이 된다.
닌 또 왜..
에드워드 시모어에게는 토머스 시모어(Thomas Seymour, 1509~1549)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형의 권력을 질투해서 싹 속의 벌레(Ver dans le fruit)라고 불렸다. 계속 형의 권력을 장악하기위해 음모를 꾸며, 어린 에드워드6세에게 용돈을 주면서부터 이간질을 시작하면서 왕에게 ''국고를 해프게 쓰는 저희행님때문에 폐하까지 그 영향을 받게되었습니다''라고 하고 2년안에 제거하고 다른 국가 왕들처럼 권력을 행사하십시오 라고 하지만, 에드워드6세는 협조하지 않음.
토머스는 헨리8세의 6번째부인 캐서린 파(Catherine Parr, 1512~1548)와 헨리8세 서거후 1547년 재혼하는데, 캐서린의 집에 14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미래의 엘리자베스1세)도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1548년 캐서린은 한날 토머스가 엘리자베스 공주와 키스하는 장면을 발견하자마자 정치적으로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권을 가진 공주로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 즉시 엘리자베스 공주를 앤소니 대니(Anthony Denny, 1501~1549)의 집으로 보낸다. 1548년 하반기에 캐서린은 토머스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출산중 사망해버리자마자 토머스는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달려가 구애를 하며 결혼을 하자고 제안.
엘리자베스 공주는 개인적으로는 준비가 되어있지만, 에드워드6세가 의회의 승인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며 거부당함. 이 일이 있고나서 의회는 다양한 비리, 횡령, 뇌물, 왕실 명예훼손(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통한 권력 찬탈시도)등의 죄목으로 토머스를 체포. 이전에 자기 형이자 섭정대신인 에드워드 시모어를 뒤에서 깐 죄목까지 싹다 유죄가 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1549년).
2번째 섭정등장
1549년부터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문제와 토지에 공용울타리를 두는 인클로저로 인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 사태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에드워드 시모어는 사실상 방관하였으나, 봉기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위협을 느낀 에드워드 시모어는 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 있어서 잘못된 방식으로 대했다는 것을 주변사람들도 모두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대신 중 한명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1527~1554)가 쿠데타를 일으킴.
이후 에드워드 시모어가 체포되고 사실상 인질삼아 붙잡고있던 에드워드6세를 다시 데리고 나온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수감중에도 더들리를 실각시키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1552년 처형.
존 더들리는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1550년부터 섭정이였는데, 막무가내식으로 일을 멋대로 처리한 에드워드 시모어와는 다르게 나름 현실적으로서, 에드워드6세와 정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함. 여러 혼란스러운 사건들로인해 재정이 악화되면서, 재정에 관한 문제를 제1순위로 정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지만,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경제 전문가이자 상인출신으로서 재정에 관한 경험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재능있던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 1519~1579)에게 재정총관직을 맡기며 재정문제의 주도권을 넘기게 되면서 바닥까지 추락했던 파운드화의 가치를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1553년전까지 왕실 빚을 청산하는 성과를 이룩하게 된다. 이과정에서 더들리 역시 재정에 관련한 재무조사, 돈 새는 곳등을 찾아내면서 꼼꼼하게 단속을 한다.
서거
1553년 1월, 에드워드6세는 영하의 추위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발열과 기침증상이 나타나며 증상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는데, 그래도 극진한 진료로 4월에는 산책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되지만, 6월에 다시 병이 재발하면서 각혈을 하게되는데, 부종으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 당시 의료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점점 죽어간다.
그렇게 7월에 서거. 이후 후임 국왕은 큰누나이자 피의 메리로 불리는 메리1세(Mary I, 1516~1558, 재위1553~1558)이 재위했어야 하지만 에드워드6세의 유언장을 조작했다고 의심을 받는 공작 존 더들리로 인해 제인 그레이(Jeanne Grey, 1537~1554, 재위1554년 '9일천하')가 왕위에 오르는데, 덫을 놓고 메리를 사로잡으려던 더들리가 내부의 밀고로 인해 작전이 실패하면서 이후 더들리를 포함한 더들리 세력이 체포되면서 사형. 메리는 휘둘려 이 상황까지 오게된 제인 그레이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지만, 의회에서 극구 반대하면서 결국 제인 그레이도 즉위 9일만에 처형된다.
그뒤에 메리가 메리1세로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