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III(1551~1589, 재위1574~1589)
출생
1551년, 프랑스 퐁텐블로 궁전(Château de Fontainebleau)에서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남.
왕이란 참 먼 자리구나...어?
위에 형이 두명이나 있었기에, 왕이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1559년 앙리3세(Henri III, 1551~1589, 재위1574~1589)가 8세가 되던 해, 아버지 앙리2세(Henri II, 1519~1559, 재위1547~1559)가 마상창시합(1:1)에서 몸소 참전하다가 상대인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1세(Gabriel Ier de Montgommery, 1530~1574)의 마상창 나무파편이 앙리2세의 투구 사이로 들어가 머리 크게 다쳐 치료를 받다가, 서거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서 맏형 프랑수아2세(François II, 1544~1560, 재위1559~1560)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형님마저 안그래도 몸이안좋았는데 재위1년만에 서거. 이후 둘째형 샤를9세(Charles IX, 1550~1574, 재위1560~1574)가 왕위에 오르게되는데..
순식간에 왕위계승서열 1위가 되어버린다
입지좀 쌓자...
1560년 형 샤를9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왕의 동생이 받는 작위인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을 받게 되면서 차차 왕이되기위한 제왕수업을 받게 된다(아직9세). 상대적으로 다른 형제에 비해 인문학 토론, 문학과 예술등에 관심을 보인 건 메디치가문 출신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이런 앙리를 카트린은 매우 아끼게 됨.
1562년부터 시작된 프랑스내전인 종교전쟁은 아직까지 어린 앙리3세에게는 확 와닿지는 않은 듯 하다. 이후1566년 앙주공작 작위(15세)를 받고난 이후 형 샤를9세의 왕명으로 군대지휘권을 받게되는데 아직 실질적으로 군대를 조종할만한 경험도 없었고 어렸던지라, 가스파르 드 사울 타반(Gaspard de Saulx-Tavannes, 1509~1573)이 실질적인 지휘를 함.
이는 동시에 당시 고위귀족이자 위그노파의 수장격인 콩데가문의 루이 드 콩데(Louis Ier de Bourbon-Condé, 1530~1569, 앙리4세의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의 동생)의 정치적 야욕을 꺾은 결정이기도 함. 이 계기로 싸움이 격렬해진다.
종교전쟁..종교전쟁.. 요것봐라
앞서 언급한 위그노파 수장 루이 드 콩데가 1569년 조제프 프랑수아 드 몽테스끼우(Joseph-François de Montesquiou)에게 암살당하면서 위그노와 카톨릭파는 더욱더 서로를 경계하며 격렬해진다. 앙리3세는 전투마다 승리를 쟁취하면서 그 명성이 프랑스 뿐만아니라 유럽에도 알려지면서, 형 샤를9세의 심기를 건들게 되는데.. 샤를9세 본인과 다르게 외적으로나, 개인소양적으로나, 전투명성적으로나 동생보다 나은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그 명성으로 인해 슬슬 동생이 정치적으로도 간섭을 시작하면서 두 형제는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됨.
폴란드왕????내가?
제3차 위그노전쟁(1568~1570)때에도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전투마다 승리를 거뭐지며 명성이 계속 올라가는데, 이후1572년 중반에 갑자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후보들이 출마하기 시작하는데 어머니의 총애를 듬뿍받은 앙리3세가 여기에 후보로 올라가게 되고, 심지어 뽑히게 됨. 근데 1400킬로미터나 떨어진 폴란드까지 가기가 주저되었나봄.. 별 갈생각이 없어서 프랑스에서 버티고 있었다.
좋은말로 할 때 가라..
1572년 8월에 그 악명높은 바르톨로뮤 대학살이 펼쳐지는데,, 앞서 필자가 쓴 샤를9세 게시물에 언급되어있는 내용을 그대로 붙여넣겠다.
나바라는 잔 달브레(1528~1572, 재위 1555~1572)라는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분이 훗날 대왕이 되는 앙리4세(1553~1610, 재위1589~1610)의 어머니이다. 진작에 잔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게되면, 아들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거라고 보고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 왕실공주와 결혼을 하면 더 루트가 곤고해지기 때문이였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 입장에서도, 변변치 못한 아들들로 자식도 없이 잘못하면 발루아 왕조가 무너질 수 있겠다 생각하여, 잔의 아들 앙리를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고여왕, 1553~1615)와 결혼시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는데, 이 두 여왕의 생각이 일치하게 되면서 1572년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게 됨. 카트린은 아들 샤를9세마저도 당시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Gaspard II de Coligny, 1519~1572)이 샤를을 자꾸 위그노로 꼬드기는걸 가만두고 볼수가 없었는지, 기즈가문과 계획을 하나짜게되는데.. |
폴란드 왕으로 뽑혀서 사실상 재위가 시작되었는데도 프랑스에서 계속 버티다가 형에게 최후 통첩을 받고(좋은말로 할때 가는게 좋을것이다..) 1574년 초에 재위이후 6개월공백을 깨고 드디어 당시 리투아니아-폴란드연방 수도 크라코비(Cracovie)로 가서 바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됨.
내 지금 여기서 뭐하고있노...
완전 다른 국가의 왕이 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왕을 이용해 특혜를 얻어내려고 달려드는 대신들 사이에서 사실상 이용당해버림(허수아비). 선출군주제인 폴란드와 절대군주제인 본국 프랑스와는 너무 달랐던 정치구조에 앙리3세는 사실상 내려놓아버린다
됐다 마 치아라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갑자기 온 1574년 형 샤를9세가 갑자기 급사하게되면서, 폴란드에서 모든걸 내려놓고 프랑스로 후다닥 도망쳐 오게되는데.. 먼 길 돌아오면서 랑그도크지역의 배신으로 인한 도피등으로 겨우 프랑스에 와서 왕위를 물려받는다.
본모습
이분도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더불어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될만큼 기행에 사치 살인등 본인 마음대로 뒤흔드는 바람에 종교전쟁에 더 기름을 붓게되는 격이 되어버린다. 이후 동생 알랑송 드 프랑수아의 배신등으로 계속해서 전쟁이 끝날생각을 보이지 않는데, 여차저차 여러 협상을 거쳐 휴전과 전투를 계속 반복하게 됨.
쓰리앙리
나바라 드 앙리(Navarre de Henri, fut Henri IV, 1553~1610, 재위1589~1610)가 프랑스를 탈출하여 위그노세력을 규합하는 것을 계기로, 앙리3세와 호시탐탐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실세가문 공작 앙리 드 기즈(Henri de Guise, 1550~1588).
즉 3명의 앙리가 전투를 펼치는 '세 앙리의 전쟁'
사실상 여기가 종교전쟁중에 제일 분탕질 싸움에 가까울 정도로 의미없는 협상 다시 뒤통수치기등 상당히 복잡한 사건들이 많이 꼬인다
그러다 앙리3세는 삼부회를 개최하려는 명목으로 앙리 드 기즈를 불러 살해해버린다(1588년), 이후 1589년 영원할 줄 알았던 든든했던 후원자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앙리3세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는데, 여럿 배신을 하다가 하다가 이제 대법원까지 앙리3세를 지지하지 않게되어, 앙리4세가 되는 앙리 드 나바라와 손을 잡고 어찌저찌 잘 이어나가게 되는데..
암살.. 발루아 끝
1589년 여름, 자크 클레망(Jacques Clément, 1567~1589)이라는 광신도가 편지를 가져왔다는 명목으로 앙리3세를 만나, 칼로 앙리3세를 찌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클레망은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중상을 입어 본인도 사실상 살기 힘들겠다고 판단했는지 동맹을 맺은 앙리 드 나바라에게 사실상 유언을 남기는데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날 이어 프랑스 왕이 되어달라고 함.
이렇게 앙리3세가 서거하게 되는데, 발루아 왕조(Dynastie des Valois, 1328~1589)가 막을 내리고, 부르봉 왕조(Dynastie des Bourbon, 1589~1848)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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