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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건 46

예송논쟁(1차 기해예송, 2차 갑인예송)

예송논쟁(1차, 2차) 1차 예송논쟁2차 예송논쟁시기1659년(현종 원년)1674년(현종15년)발단내용1659년 효종 승하후 자의대비 조씨(1624~1688)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 장씨(1619~1674)의 국상에 자의대비 조씨(1624~1688)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논쟁  1. 기해예송(1차 예송논쟁)배경조선 17대 왕 효종(1619~1659, 재위1649~1659)이 1659년 승하하면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624~1688)의 복상기간(상복 입는 기간)을 기년복(1년)으로 할지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다. 서인과 남인은 이 논쟁에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인식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하고, 남인은 효종이 둘..

임오화변

임오화변, 1762사도세자 사망 사건으로 알려져있음. 배경I. 축복 속 세자책봉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영빈 김씨(1696~1764)로, 1726년(영조2년)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종2품 숙의에 봉해지면서 정식으로 영조의 후궁이 된다. 아래 표는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와 영빈 김씨 소생의 자녀들. 생몰년도비고화평옹주1727 ~ 1748금성위 박명원(1725~1790)과 혼인화협옹주1733 ~ 1752영성위 신광수(1731~1775)와 혼인사도세자1735 ~ 1762조선 세자, 1736년 책봉화완옹주1738 ~ 1808정후겸(1749~1776)의 양어머니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 어머니 영빈 김씨가 후궁이였으므로 후궁 소생의 자식으로 서장자로 태어나지만 이복 형 효장세자(1719~1728..

기유각서

기유각서(1909)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사법권, 행정권(감옥 사무)을 일제에 양도한다는 조약. 배경1907년 7월 19일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강제로 태자 순종(1874~1926, 재위1907~1910)에게 양위하면서 순종이 대한제국 2대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즉위식때 두 황제는 참석하지않고 내시들이 용포를 입고 분장을 해서 즉위식을 치뤘다고 한다. 이미1905년 을사늑약이후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빼앗기고 있었는데, 이 때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임명해 수탈을 가속화한다.  내용위 조약은 1909년에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행정권(감옥 사무)을..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1905년에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회담내용을 담은 기록. 1924년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극비리에 진행된 밀약. 일제 수상 가쓰라 다로(1848~1913)와 미합중국 전쟁부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iam Howard Taft, 1857~1930, 대통령재임1909~1913)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배경러일전쟁(1904~1905)이 끝나갈 무렵인 1905년 7월, 일본이 우위를 차지해 사실상 승리가 확정되던 시점에 전쟁으로 막대한 재정을 쏟은 일제는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열강들로부터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당시 미국은 일제에 호의적인 입장(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매우경계한 미국)으로 마침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기위해..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1882년(고종18년)5월, 조선과 미국간에 조인된 수호 통상 조약.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1810~1884), 김홍집(1842~1896)과 미국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cufldt, 1822~1895)간에 체결된 통상 조약.  배경1854년 페리 제독(Matthw Perry, 1794~1858)이 미일조약으로 첫 개항을 할 당시 조선은 문이 굳게 닫혀있는 쇄국정책을 하고있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후 미국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항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여 다음해 1867년 로버트 윌슨 슈펠트가 직접 조선을 탐문하며 조선을 개항시킬 계획을 수립한다. 그 야욕은 1871년 신미양요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으나 흥선대원군(이하응, 1..

조선의 붕당

붕당정치적 사상,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집단을 일컬음. 배경1560년대 외척으로서 권력의 정점을 찍던 훈구파 대신인 소윤 윤원형(1503~1565)이 1565년 누이인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어머니, 1501~1565)가 서거함에 따라 몰락하고 사림이 다시 기용되면서 1567년 명종(1534~1567, 재위1545~1567)이 승하하고 재위에 오른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는 덕망이 높은 학자 집단인 사림을 대폭 기용하면서 문치주의형 정치를 이끌어가게 되면서 사림이 정계를 완전 주도하게 된다.그러나 1575년 사림내에서 김효원(1542~1590)과 심의겸(1535~1587)사이에 막대한 권한을 가진 이조전랑()의 임명문제로 인해 대립이 일어나게 되면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

회니시비

회니시비조선 제19대 임금 숙종(1661~1720, 재위1674~1720)대에 있던 서인 내 사상분쟁. 간단하게 송시열과 윤증의 절교.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현재의 대전)에 살았고, 윤증은 충청도 이산(현재의 논산)에 살았어서 회덕과 이산의 앞글자를 따서 회니시비라고 불려진다. 배경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1629~1714)은 1669년(현종10년) 아버지인 윤선거(1610~1669)가 사망하면서 스승 송시열에게 묘갈명(비문)을 부탁하게 되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사망하기전 윤증과 학문적문제 대립, 예송논쟁 당시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이미 사이가 많이멀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 내용(예를들면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1876)'조일수호조규'로도 불리는 강화도 조약은 1876년(고종12년) 조선과 일제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선에)조약이다.  배경1860년대 이후부터 조선 연안에 외국 이양선들이 출몰해 통상을요구하며 이에 불응할 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야만적인 행태로 이어졌는데, 1864년 조선25대 임금 철종(1831~1864, 재위1849~1864)이 승하하고 26대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즉위하지만 만12세의 어린나이로 아버지 이하응(흥선대원군, 1821~1898, 섭정재임1864~1874)이 섭정이되어 조선을 통치하게 된다.흥선대원군은 조선 외적으로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들에 대해 강경정책으로 대응하는데 이것이 흥선대원군의 대표적 외교정..

만민 공동회

만민 공동회(1898)1898년(광무1년) 열강들(러시아,프랑스)의 이권 침탈에 대항해 제국주의 침탈 반대운동을 명목으로 조직된 민중대회. 배경유럽에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열풍이 19세기말 조선까지 들어와 이권을 침탈하고자 온갖 계략을 일삼았는데, 1896년 고종(1852~1919, 조선재위1864~1897, 대한제국재위1897~1907)이 러시아공사관에 1년간 머무는 아관파천이후 열강들의 이권침탈에도 모자라 내정간섭까지 점점 조선의 미래가 불투명해져가는데..아관파천이 진행중이던 1896년 7월, 갑신정변(1884)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1895년 사면령으로 귀국, 1864~1951)을 필두로 해 독립협회를 조직해 민중계몽, 참정권, 천부인권을 소개하고 조선백성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선언을 하고..

병인양요

병인양요(1866)1866년(고종2년) 10월, 프랑스가 조선에 전투를 일으키는데 명분은 다음과 같다. 1866년 초반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천주교도 박해)로 인해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이 처형된 것을 빌미로 조선 강화도로 쳐들어온다. 배경I. 조-프-영 동맹1860년초반까지만 해도 천주교에 대해 조선은 상당히 관대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때 들어와서 선교를 열심히 한 덕분에 1865년경에는 2만여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해졌다. 조선은 1864년 한창 남하정책을 진행하던 러시아 제국의 관계자들이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정부에 프랑스2제정, 대영제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면 프랑스 제국 황제 나폴레옹3세(Napoléon III, 1808~1873, 대통령재임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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