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1762
사도세자 사망 사건으로 알려져있음.
배경
I. 축복 속 세자책봉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영빈 김씨(1696~1764)로, 1726년(영조2년)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종2품 숙의에 봉해지면서 정식으로 영조의 후궁이 된다. 아래 표는 영조(1694~1776, 재위1724~1776)와 영빈 김씨 소생의 자녀들.
생몰년도 | 비고 | |
화평옹주 | 1727 ~ 1748 | 금성위 박명원(1725~1790)과 혼인 |
화협옹주 | 1733 ~ 1752 | 영성위 신광수(1731~1775)와 혼인 |
사도세자 | 1735 ~ 1762 | 조선 세자, 1736년 책봉 |
화완옹주 | 1738 ~ 1808 | 정후겸(1749~1776)의 양어머니 |
사도세자의 본명은 이선. 어머니 영빈 김씨가 후궁이였으므로 후궁 소생의 자식으로 서장자로 태어나지만 이복 형 효장세자(1719~1728)가 9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서 영조는 이선이 태어난지 100일만에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서종제의 딸, 1693~1757)의 양자로 들여 태어난지 1년만에 세자에 책봉된다.
II. 아버지의 의심
늦은나이에 다시 본 장자이자 세자가 된 사도세자를 영조는 매우 엄히 키웠다고 한다. 엄히 키운 것 만큼 기대감역시 컸는데, 1749년(영조25년)엔 영조의 건강상 문제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맞기게 되는데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튀는 사도세자 때문에 영조는 세자와 심한 갈등을 겪게된다. 13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회복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세자의 정신질환
13년간의 대리청정 기간동안 사도세자의 숙제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확고한 정치적이득을 취했어야 했는데,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자신이 취했던 탕평책을 조금이나마 원리를 이해시키겠금 했던 게 목적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속에서 중재는 못할망정 예상밖의 튀는 행동, 점점 정치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사도세자의 스트레스 누적으로 정신질환까지 발병해버린다[영조실록, 1755년 영조31년].
정신적 압박감이 커짐에 따라 사도세자는 눈에 띄게 감정조절이 힘든 조증에 가까운 질환을 앓았던 것 같다. 거기다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이 더욱 심해지는 시점이 1757년인데, 이 당해에 할머니와 적모를 모두 잃는 일이 벌어진다. 이 할머니와 적모는 다음과 같다.
본관 | 생몰년도 | 비고 | |
인원왕후 김씨 | 경주 | 1687 ~ 1757 | 사도세자의 할머니, 영조의 적모 |
정성왕후 서씨 | 대구 | 1693 ~ 1757 | 사도세자의 적모 |
이 둘은 사도세자와 영조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상처받은 사도세자의 마음을 돌봐주었는데 이들이 모두 한해에 세상을 떠나버리니 마음을 어루만져줄 사람이 사라진 사도세자에 있어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였을 것이다. 이후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은 더욱 악화된다.
나경언
정2품 형조판서 윤급(1697~1770)의 종이였던 나경언(?~1762)이 1762년 5월에 형조에 고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노론인 홍봉한(1713~1778)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으로 6개월만에 급속도로 진급하면서 같은 노론계열 인사들은 이에 불만을 가져 홍봉한 세력을 몰아내고 덩달아 세자까지 폐위시키고자 한 고변이다.
윤급, 김한구(), 김상로(1702~1766)등은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살해하고 풍기를 문란시켰으며 세자의 지위로서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다는 것에 대한 세자의 비행행위와 이대로 두면 앞으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을 윤급의 종 나경언을 통해 고변케끔 했다.
이에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이를 고변한 나경언과 대질심문할 수 있게끔 요구하는데 영조는 이를 거부함으로서 더욱 고변내용이 확대해석됨에따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하게 된다. 사도세자는 자결명령을 따르지 않고 버티게 됨에 따라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아무것도 주지못하게 하고 아무도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 영조는 세손인 이산(미래의 정조, 1752~1800, 재위1776~1800)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지 못하게 내관을 시켜 세손을 내보낼 정도로 엄격하게 다스린다. 결국 4일만에 굶어죽은 사도세자는 8일 뒤 사망이 확인되면서 영조는 세자를 복구시켜 사도 시호를 내리게 되면서 우리가 알게되는 사도세자로 역사속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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