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그레고리오11세

Mintaka5 2025. 5. 23. 12:19
반응형

본명 :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Pierre Roger de Beaufort)

201대 교황 그레고리오11세(Gregorius PP. XI, 1330~1378, 재위1370~1378)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직위 200대 교황 201대 교황 202대 교황
출신 프랑스 랑그도크, 그리자크  프랑스, 리모주 나폴리 왕국, 이트리
명칭 우르바노5세
Urbanus PP. V
그레고리오11세
Gregorius PP. XI
우르바노6세
Urbanus PP. VI
생몰년도 1310.xx.xx ~ 1370.12.19  1330.05.09 ~ 1378.03.27 1318.xx.xx ~ 1389.10.15
콘클라베기간 1개월 7일
(1362.09.22~1362.09.28)
2일
(1370.12.29~1370.12.30)
3일
(1378.04.07~1378.04.09)
재위 1362.09.08 ~ 1370.12.19 1370.12.30 ~ 1378.03.27 1378.04.08 ~ 1389.10.15

 

201대 교황 그레고리오11세 초상화
교황 그레고리오11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330년 5월 9일, 프랑스 리모주(Limoges)에서 아버지 기욤2세 로제(Guillaume II Roger, 1290~1380)와 어머니 마리 드 샴봉(Marie de Chambon, 1310~1344)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프랑스인 교황이며 201대 교황이자 아비뇽 유수(1309~1378)시절 마지막 교황이다. 족벌주의 노선으로 어린시절 바로 고위직에 올라 추기경이 된 다음 공부를 깊이하여 신학자이자 법학자가 된 케이스인데, 이와는 별개로 상당한 능력을 가졌고 겸손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모든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370년 교황 우르바노5세가 선종하고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즉위하여 뛰어난 외교력으로 여러 국가들을 무혈제압하지만 비스콘티 가문과 피렌체와는 격렬한 싸움을 거듭하고 특히 피렌체와는 8성인 전쟁이라는 격렬한 싸움에 휘말려 모든 피렌체인들을 파문과함께 금지 제재와 더불어 경제 제재까지 가하여 유럽전체 경제흐름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1377년 배를 통해 로마로 입성하면서 69년간 진행되었던 긴 아비뇽 유수(1309~1378)를 종식시킨 군주이기도 하다. 

 

성직

교황 클레멘스6세(Clemens PP. VI, 재위1342~1352)의 조카로 이미 1348년 19세의 어린 나이에 삼촌 교황으로부터 추기경 서임을 받고 페루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 더 학문을 깊게 연구하여 신학자와 법학자로서의 출중한 능력과 함께 성품과 인품까지 훌륭해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370년 콘클라베

교황 우르바노5세(Urbanus PP. VI, 1310~1370, 재위1362~1370)가 1370년 12월 19일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이당시는 아비뇽 유수(1309~1378)가 진행중이던 기간으로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는 아비뇽 교황청이였고 1370년 12월 29일로 날짜가 잡힌다. 총21명의 추기경중 1명이 불참하여 20명이 참석한 콘클라베는 2일간(1370.12.29~1370.12.30)투표가 진행되어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프랑스 추기경들이 참석해있었고 1370년 12월 30일 콘클라베 이틀차때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 추기경을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하게 된다. 그렇게 그레고리오11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외교 교황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 전임 아비뇽 교황들이 추진했던 카톨릭 개혁을 계속 이어나가는 노선을 선택하였고 교회내 규율을 스스로 지키면서 안정을 추구했는데, 게다가 뛰어난 외교력을 가졌던 교황 그레고리오11세는 동방교회 그리스 정교와 로마 교회의 재통합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해 교회의 단합된 결집을 추구하였고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시칠리아, 나폴리등을 외교력을 발휘하여 무혈제압하였으나 한창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진행중이던 백년전쟁(1337~1453)을 종식시키고 두 국가의 군주(프랑스 샤를5세, 잉글랜드 에드워드3세)를 서로 화해시키려고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II. 8성인 전쟁

1372년 교황은 적이였던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o Visconti, 1323~1385, 재위1354~1385)의 영토 확장 야욕을 잠재우기 위해 교황령내 레지오의 군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침공을 시도한다. 그레고리오11세는 백년전쟁때 고용된 잉글랜드 용병대장, 나폴리 여왕, 헝가리 국왕, 신성로마황제등으로부터도 군사를 지원받고 맹렬히 비스콘티 영지를 공략하는데, 처음에는 나름 잘 버티던 비스콘티는 계속된 공세와 군사력 차이등으로 인해 휴전 협상을 요청하였고 교황측에에 수많은 뇌물을 먹여 교황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스콘티와의 휴전이 성립되고 교황은 계속해서 영토 확장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이번 타켓은 피렌체가 된다. 그레고리오11세는 1372년 비스콘티 가문을 칠 때 교황령 레지오중 피렌체만이 군사 지원을 거부한 것(곡물 지원은 함)을 빌미삼아 피렌체를 치고자 하였는데 이미 비스콘티 가문 사람을 통해 정보를 파악하고있던 피렌체는 당시 그레고리오11세가 프랑스인 교황 특사와 총독을 피렌체에 임명해놓은 상태였고 피렌체인들은 프랑스인 대사(프랑스 교황 대사들은 수년간 전쟁에 보냈던 곡물이 바닥나 위기가 오자 교황에게 곡물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대사들은 이 요청을 거절한다)와 총독에 불만이 자자했는데 마침 이전에 교황이 비스콘티 가문을 칠 때 군사지원 대신 곡물지원을 해줬는데 이후 피렌체의 곡물 사정이 매우 나빠지게 되는데 위 부가설명과 같이 교황 대사들은 곡물 지원을 거부하기에 이르자 피렌체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1375년 피렌체는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 시뇨리아가 임명한 8명의 위원회에 위임되고 이들은 8명으로 구성된 전쟁 위원장으로 교황에 대항한다. 이러한 반란에 그레고리오11세는 모든 피렌체인에 대한 금지제재(사실상 약탈, 살인, 노예화 합법)에 경제제재, 파문을 거듭하여 사실상 피렌체를 유럽국가들로부터 고립시켜버린다. 피렌체는 이러한 교황의 조취에도 반 교황 행위를 하며 내부적으로 더 똘똘 뭉쳐 대항하는데, 당시 유럽에서도 경제규모가 상위권이였던 피렌체를 제재한 결과 경제 흐름이 막히게 되면서 유럽 전체의 경제에도 문제를 주게 되어버린다. 

 

III. 아비뇽 유수 종료와 교황의 로마 복귀

때마침 긴 아비뇽 유수(1309~1378)를 끝내고 교황이 로마로 귀환할 준비가 한창일 때 터진 반란이라 모든 귀환 준비가 중단되어버리면서 교황령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카테리나 다 시에나(Caterina da Siena, 1347~1380)가 70년간 지속된 아비뇽 유수를 하루빨리 종식시켜 교황이 원래의 주교좌가 있는 로마로 복귀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모든 성직자들과 각국 군주들에게까지 호의를 얻게 되며 교황 그레고리오11세를 압박한다. 1376년 교황이 피렌체에 내린 금지제재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고 교황의 로마 복귀가 중단됨에 따라 카테리나가 스스로 피렌체 사절 자격으로 아비뇽 교황청으로 가서 교황을 설득하지만 실패하자 피렌체인들은 카테리나를 버리고 독자적인 사절을 아비뇽 교황청에 보내서 협상을 주도한다. 교황은 이전에 나폴리 여왕 조안나1세(Joanne I, 1325~1382, 재위1343~1381)에게 갤리선을 요청해 로마로 복귀할 것을 알렸었고, 이에 마르세유로 갤리선이 당도하게 되면서 1376년 9월, 교황은 아비뇽에서 마르세유로 이동해 갤리선을 타고 로마로 향한다. 여러 장소에 정차하고 4개월간의 항해를 거듭한 끝에 1377년 1월이 되어서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선종

그러나 오랜기간 항해와 이동을 거듭하여 기력이 떨어져 건강이 상했던 교황은 1378년 3월 27일, 로마에서 48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선종 이후 서구대이교 상황

선종한 그레고리오11세의 후임 교황인 우르바노6세(Urbanus PP. VI, 1318~1389, 재위1378~1389)의 즉위년인 1378년부터 촉발된 서방교회 대분열은 1410년대에 들어도 도저히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3명의 교황들(로마 교황 그레고리오12세,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 피사 대립교황 요한23세)이 서로 물고 뜯는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도저히 회복이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로마왕(황제 대관식을 하지 않은 선출 황제)인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 로마왕재위1410~1437, 신성로마재위1433~1437)가 공의회를 열 것을 제창하여 피사 대립교황인 요한23세가 공의회를 소집한다. 그렇게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내놓은 최종 결과는 3명의 교황과 대립교황2명 모두 퇴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자는 쪽으로 합의하게 된다. 그렇게 교황 그레고리오12세(Gregorius PP. XII, 1327~1417, 재위1406~1415)와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Antipope Benedictus XIII, 1328~1423, 대립교황1394~1415), 피사 대립교황 요한23세(Antipope Ioannes XXIII, 1370~1419, 대립교황1410~1415)모두 퇴위하게 되며 공의회에서 바로 콘클라베가 열리게 되었고, 1417년 11월 11일 오도네 콜론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르티노5세(Martinus PP. V, 1369~1431, 재위1417~1431)로 즉위하게 되면서 사실상 40년이나 간 서방교회 대분열(서구대이교, 1378~1417)이 사실상 종식된다.  

반응형

'로마 교황 > 201대~현직 교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니파시오9세  (0) 2025.05.22
우르바노6세  (0) 2025.05.22
인노첸시오7세  (0) 2025.05.21
마르티노5세  (0) 2025.05.21
에우제니오4세  (0) 2025.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