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조반니 바티스타 치보(Giovanni Battista Cybo)
213대 교황 인노첸시오8세(Innocentius PP. VIII, 1432~1492, 재위1484~1492)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직위 | 212대 교황 | 213대 교황 | 214대 교황 |
출신 | 제노바 공화국, 첼레리구레 |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
명칭 | 식스토4세 Sixtus PP. IV |
인노첸시오8세 Innocentius PP. VIII |
알렉산데르6세 Alexander PP. VI |
생몰년도 | 1414.07.21 ~ 1484.08.12 | 1432.11.05 ~ 1492.07.25 | 1431.01.01 ~ 1503.08.18 |
콘클라베기간 | 4일 (1471.08.06~1471.08.09) |
4일 (1484.08.26~1484.08.29) |
6일 (1492.08.06~1492.08.11) |
재위 | 1471.08.09 ~ 1484.08.12 | 1484.08.29 ~ 1492.07.25 | 1503.09.22 ~ 1503.10.18 |
출생
1432년 11월 5일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Genova)에서 아버지 아르노 치보(Arano Cybo, 1377~1457)와 어머니 테오도리나 데 마리(Teodorina de' Mari, 1400~1470)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제노바 출신의 213대 교황으로 상원의원이던 아버지 아르노 치보가 나폴리 총독으로 근무하던 때 이곳에서 자라 145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성직자의 길을 걷게되는 인물이다. 교황청에 들어가 교황 바오로2세, 식스토4세 치하에서 주교, 추기경등에 서임되고 1484년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발도바 십자군, 나폴리 전쟁등으로 정신없이 보내는 와중에 피렌체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1449~1492, 재임1469~1492)와 손잡고 자신의 사생아 프란치스코 치보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 마달레나와 결혼시키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미래의 레오10세)를 추기경에 서임시키는등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담으로 인노첸시오8세는 현재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선출되었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 부제급 추기경 원로가 나와서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포하는 라틴어 선언문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하여 선출된 교황이기도 하다.
성직
제노바 공화국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아르노는 1455년 로마에 와서 교황 갈리스토3세(Callistus PP. III, 1378~1458, 재위1455~1458)치세때 원로원이라는 높은 직책을 맡으면서 조반니는 아버지가 나폴리 총독으로 부임하여 나폴리로 가서 나폴리 왕을 겸임하던 아라곤 왕 알폰소5세(나폴리 알폰소1세, Alfonso V, 1396~1458, 아라곤재위1416~1458, 나폴리재위1442~1458)나폴리 궁정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나폴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457년 아버지 아르노가 사망하기 전 유언에 따라 나폴리 궁정을 나와 파도바, 로마로 이주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사실상 아버지 아르노가 사망한 이후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직 과정 수련과 공부는 필리포 칼란드리니(Filippo Calandrini, 1403~1476) 추기경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교황청에도 선이 닿으면서 교황 바오로2세(Paulus PP. II, 1417~1471, 재위1464~1471) 치하의 교황청에서 일을 맡기도 한다. 이후 1466년 교황 바오로2세로부터 사보나 주교 부임과 함께 주교로 서임된 뒤 1473년 교황 식스토4세(Sixtus PP. IV, 1414~1484, 재위1471~1484)로부터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1484년 콘클라베
1484년 8월 12일 교황 식스토4세가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1484년 8월 26일 콘클라베가 열리고, 총32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중 7명이 불참한 25명이 참석하여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 내 각 가문 파벌들간의 분쟁으로 변수가 많은 상황에서 콘클라베가 진행되는데 만토바 공국의 후원을 받는 스테파노 나르디니 추기경이 유력한 교황 후보였고, 오르시니 가문의 후원을 받는 조반니 콘티 추기경, 나폴리의 후원을 받는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추기경, 추기경단들에게 뇌물을 제공해 자신이 뽑힐 수 있도록 로비를 했던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등이 있었다. 28일 첫 투표가 시작되었고 29일까지 총4일간 진행된 투표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치보 추기경이 52세의 나이로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명은 '인노첸시오(Innocentius)'이며 인노첸시오8세(Innocentius PP. VIII, 1432~1492, 재위1484~1492)로 즉위하게 된다.
교황
I. 하베무스 파팜
2025년 5월 8일 교황 레오14세(Leo PP. XIV, 1955~ , 재위2025~ )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부제급 추기경이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서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라틴어 선언문인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이 인노첸시오8세가 선출된 1484년 8월 29일에 카톨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II. 발도파 십자군
1173년에 생긴 발도파는 교리상 카톨릭 교회와 줄곧 마찰을 일으켜서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3세(Innocentius PP. III, 1161~1216, 재위1198~1216)에 의해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된다. 발도파는 이단으로 선포된 이후 이단으로 몰린자들은 화형을 당하는 등 박해가 시작되는데, 카톨릭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1300년대 초반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통치하는등의 행태를 보인다. 1487년 인노첸시오8세는 발도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는 칙서 'Id Nostri Cordis'를 발표하여 군사 공세를 펼치게끔 카톨릭 군주들에게 호소한다.
III. 외교
1485년 인노첸시오8세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미래의 교황 율리오2세)의 나폴리와의 전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는 나폴리와의 전쟁으로 인해 당시 나폴리를 통치하던 아라곤의 대항으로 교착상태가 장기화되자 인노첸시오8세는 승리가능성을 낮게 보고 평화협정을 준비하게 되면서 1486년 8월 평화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고, 전쟁을 지지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교황의 신뢰를 잃고 조용히 묻혀간다. 1492년에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최후 결사항전을 하던 이슬람 토후국인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 1232~1492)이 무너지게 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면서 이를 크게 기뻐한 인노첸시오8세는 레콩키스타(스페인어 '재정복'이라는 뜻, 722년부터 1492년까지 770년에 걸쳐서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회복했다는 뜻)의 일등공신이자 부부인 아라곤 왕 페르난도2세(Fernando II, 1452~1516, 재위1479~1516)와 카스티야 연합왕국 여왕 이사벨1세(Isabel I, 1451~1504, 재위1474~1504)에게 '카톨릭 부부왕'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기도 한다.
IV. 메디치 가문과 로렌초 데 메디치
인노첸시오8세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손잡을 만한 대상을 찾다가 피렌체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재임1469~1492)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우군이 되고 돈독해지기 위해 1488년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인 15세의 마달레나 데 메디치(Maddalena de' Medici, 1473~1519)와 자신의 사생아인 프란체스코 키보(Francesco Cybo, 1450?~1519)와 결혼시키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메디치 가문 구성원중 한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그 추기경에 오르는 인물이 13세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미래의 레오10세)가 선출되었고 1489년 3월 조반니는 14세에 불과한 나이에 추기경에 서임된다.
선종
1492년 60세에 다달은 인노첸시오8세는 당해 7월 갑자기 열병에 걸려 몸져눕게되는데, 악화되는 건강으로 인해 점점 위독해져 7월 25일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