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201대~현직 교황

비오7세

Mintaka5 2025. 5. 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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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치아라몬티(Barnaba Niccolò Maria Luigi Chiaramonti)

251대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

  전임 교황 당시 재직 교황 후임 교황
프로필 250대 교황
비오6세
Pius PP. VI
1717~1799
재위1775.02.15~1799.08.29
251대 교황
비오7세
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03.14~1823.08.20
252대 교황
레오12세
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09.28~1829.02.10

비오7세, 출처-위키피디아

출생

1742년 교황령 체세나(Cesena)에서 아버지 스키피오네 치아라몬티(Scipione Maria Niccolò Chiaramonti, 1698~1750)와 어머니 조반나 코로나타 기니(Giovanna Coronata Ghini, 1713~1777)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251대 교황으로 프랑스 나폴레옹(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과의 대립으로 교황령이 점령당하고 프랑스군에 의해 납치당해 고령으로 수년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겨우 교황령 로마로 돌아와서 재정비를 하면서 기틀을 다졌던 교황이다. 23년 재위기간의 절반이상을 나폴레옹으로인해 사실상 교황령의 재정에 비상이 걸리고 안보차원에서도 위기였던 시기의 교황으로 나름대로 유럽내 질서를 유지시키기위해 몸소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고 시간을 벌게 해준 인물로도 평가된다.     

 

성직

모친인 조반나 코로나타 기니의 가문인 기니 가문과 전임 교황 비오6세(Pius PP. VI, 1717~1799, 재위1775~1799)의 가문인 브라스키 가문은 서로 친척인 가문으로 8세인 무렵 1750년 아버지 스키피오네가 사망하여 과부가 된 어머니 조반나는 자녀들을 다 키우고 파노의 카르멜 수녀회(Moniales Ordinis Carmelitarum)에 들어가 수녀가 된다. 루이지는 14세가 되던 1756년 고향 체세나 스파치아노 언덕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 몬테(Santa Maria del Monte)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학업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서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윗전의 눈에 들어 그들은 루이지를 로마에 있는 성 안셀로 대학교에서 수학시키고 교수 생활을 하다가 1775년 먼 친척이였던 안젤로 브라스키 추기경이 교황 비오6세로 선출되면서 루이지는 로마 산 파올로 베니딕토회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고 1782년 티볼리(Tivoli, 로마 동편)의 주교로 임명된다. 이후 3년이 지난 1785년, 3년간의 주교생활동안 뛰어난 능력을 보인 루이지는 비오6세로부터 이몰라 교구로의 전보와 함께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1799년 콘클라베

1798년 초, 프랑스 군 사령관 나폴레옹(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가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 공화국을 세우고 비오6세에게 교황령의 권리까지 포기하라고 종용하는데 비오6세가 거부함에따라 나폴레옹은 비오6세를 피렌체 쪽으로 추방시켜버림으로서 사실상 교황령의 행정기능이 중지되어버린다. 1799년 프랑스군이 비오6세를 포로로 잡아버림으로서 포로가 되어버린 비오6세는 프랑스에 끌려가면서 1799년 4월 프랑스 발랑스(Valence)에서 선종할때까지 감금당한다. 당시 로마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던 탓에 콘클라베는 추기경 수장이였던 주세페 알바니(Giuseppe Albani, 1750~1834)는 베네치아에서 콘클라베를 연다. 45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35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고 당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1799년 11월30일부터 1800년 3월 14일까지 콘클라베가 이어진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3개월간의 투표 끝에 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치아라몬티 추기경이 251대 교황으로 선출되어 전임 교황 비오6세의 이름을 따서 비오7세로 명명하여 즉위한다.  

 

교황

비오7세는 3월14일 베네치아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4개월이 지난 뒤 7월 로마로 겨우 입성하였는데 사실상 교황령 재정이 텅 빈 상황에서 비오7세는 에르콜레 콘살비(Ercole Consalvi, 1757~1824)추기경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여 우선적으로 재정안정을 찾게끔 하였고 부지런하게 회복을 꾀하는 도중 당시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이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혁명이후 혼란스러운 프랑스 내부상황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힘이필요함을 깨닫고 정교협약을 제안하는데 모든 조건이 교황령에 불리한 조건들로 구성된 협약이였지만 당장의 상황적 손해보다 카톨릭의 장기적 이익을 추구를 앞세워 1801년 프랑스와 협약을 맺는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제정을 선포함에 따라 고대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과시하기 위해 역대 프랑스 군주들이 대관식을 치뤄왔던 랭스 대성당이 아닌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루기로 결정한다.

나폴레옹이 교황 비오7세로부터 축성받기를 원해 비오7세를 초청함에 따라 많은 교황령 성직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오7세는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그러나 이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기위해 전선을 확장하고 유럽전체가 전쟁터가 됨에 따라 다시 교황과 나폴레옹의 관계가 악화되는데, 그 결과 1808년 2월 프랑스 제국군이 로마를 점령하고 1809년 교황령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 합병시키기까지 해버림에 따라 극대노한 비오7세는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칙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칙서에 이탈리아 전체의 봉기를 막기위해 프랑스군이 교황 비오7세를 체포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프랑스군은 교황의 서재가 있던 퀴리날레 궁 성벽을 올라 문을 부수고 체포하여 프랑스로 끌고간다.

교황청 내부 성직자들은 교황이 납치된 다음날이 되어서야 이러한 사건이 벌어짐을 알고 난리가 난다. 이러한 프랑스의 행동에 교황령과 이탈리아 뿐만아니라 모든 유럽국가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일어남에 따라 깜짝 놀란 나폴레옹이 교황을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사보나로 유폐시킬 계획을 바꿨다가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70대의 노쇠한 비오7세를 여러 도시를 옮기며 강제이주시킨다. 나폴레옹의 강압적인 협상을 계속해서 거부해오면서 시간을끌어오던 교황 비오7세는 1814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패하고 겨우 로마로 돌아온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회의가 열렸을 때 콘살비 추기경을 교황령 대표로 파견해 영토반환을 해오게끔한다. 

그러나 1815년 100일천하로 몰락하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겨우 탈출해 군을 모아 다시 교황령을 공격하여 피신하는등 고령으로 힘든시기를 겪지만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몰락당하게 되면서 겨우 안정을 찾게 된다. 겨우 안정을 찾은 비오7세는 교황령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안정을 추구하고 긴 전쟁으로 훼손된 로마 시가지 재건, 전쟁으로 공석이 된 유럽 국가들에 주교를 임명하는등 80에 가까운 고령에도 쉴틈없이 직무를 수행한다. 

 

선종

1823년 8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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