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카스틸리오니(Francesco Saverio Castiglioni)
253대 교황 비오8세(Pius PP. VIII, 1761~1830, 재위1829~1830)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프로필 | 252대 교황 레오12세 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09.28~1829.02.10 |
253대 교황 비오8세 Pius PP. VIII 1761~1830 재위1829.03.31~1830.12.01 |
254대 교황 그레고리오16세 Gregorius PP. XVI 1765~1846 재위1831.02.02~1846.06.01 |
출생
1761년 이탈리아 안고나 친골리(Cingoli)에서 아버지 오타비오 카스틸리오니(Ottavio Castiglioni, 1714~1804)와 어머니 산지아 테레사 기슬리에리(Sanzia Teresa Ghislieri, 1774~1846)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773년 신학교에 들어가 1785년 사제로 서품된 이후 교회법에 지대한 연구를 하고 여러 교구에서 총대리인, 교무처장등을 거쳐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다지다가 1800년 주교로 서품되지만 1808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후 추방당하고 이러한 모습을 높게 평가한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에 의해 1816년 추기경에 서임된다. 두차례의 콘클라베(1823, 1829)에 참석하였고 1829년 콘클라베에서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8세로 명명하고 즉위한다. 1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족벌주의 폐지, 비리 척결등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유럽 내 카톨릭 신자들의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온건적 개방적행보를 보인다.
성직
1773년 신학교에 입학해 1783년 부제로 서품되고 1785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에도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대주교인 조반니 데보티(Giovanni Devoti, 1744~1820)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교회법 연구에 몰두하여 1788년 박사학위를 받고 모든 학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목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789년엔 지도교수인 조반니 데보티 대주교의 총대리인으로 임명되어 활동, 1790년 파노 교구 교구장 안토니오 가브리엘레 세베롤리(Antonio Gabriele Severoli, 1757~1824) 추기경의 총대리로 자리를 옮겨 추기경으로부터 사목지도를 받고 1795년 고향 칭골리 대성당 교무처장직을 맡으면서 공부를 지속하고 1797년 아스콜리 피체노 교구 교구장 조반니 안드레아 아르케티(Giovanni Andrea Archetti, 1731~1805)추기경의 총대리로 자리를 옮긴다. 1800년 교황 비오7세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아 몬탈토의 주교로 임명되지만 1808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Napole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가 도시를 점령하고 조반니는 나폴레옹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하게 되면서 투옥되고 북부 파비아(Pavia)로 추방되는데 이후 이러한 행보를 눈여겨보던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로부터 1816년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콘클라베
I. 1823년
교황 비오7세가 1823년 선종함에 따라 콘클라베가 소집된다.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카스틸리오니 추기경 역시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총49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으로 구성된 콘클라베는 아니발레 델라 젠가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12세(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1829)로 명명되어 즉위한다.
II. 1829년
교황 레오12세가 1829년 선종함에 따라 1823년이후 6년만에 콘클라베가 소집되는데, 카스틸리오니 추기경은 1823년에이어 콘클라베에 참석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데, 당시 프랑스 왕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가 유력 교황후보이자 프랑스파인 에마누엘레 데 그레고리오(Emmanuele de Gregorio, 1758~1839)추기경과 반대인 바르톨로메오 파카(Bartolomeo Pacca, 1756~1844)추기경이 언급되면서 바르톨로메오 추기경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둘 말고 타협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온건파인 카스틸리오니 추기경에게 표가 몰리게 된다. 카스틸리오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 선출되어 비오8세라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비오8세는 즉위 이후 족벌주의를 철폐하고 교황령 내 비리를 척결하기위한 정책을 주도하였고 다소 개방적인 사고와 온건적인 성향으로 유럽 내 카톨릭 신자의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등의 행보를 보인다. 특히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7월혁명으로 프랑스 왕 샤를10세(Charles X, 1757~1836, 재위1824~1830)가 퇴위하고 프랑스 시민군으로부터 시민왕(Le roi Citoyen)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필리프1세(Louis-Philippe Ier, 1773~1850, 재위1830~1848)가 즉위하면서 '가장 그리스도인 다운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등 행보를 보이지만 이미 콘클라베때 부터 추기경들이 우려한 비오8세의 건강문제가 대두되는데, 교황으로 즉위하고 쉴틈없이 정무에 힘쓰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점점 쇠약해진다.
선종
결국 1830년 11월 30일 69세의 나이로 선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