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안니발레 세르마테이 델라 겐가(Annibale Sermattei della Genga)
252대 교황 레오12세(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1829)
전임 교황 | 당시 재직 교황 | 후임 교황 | |
프로필 | 251대 교황 비오7세 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03.14~1823.08.20 |
252대 교황 레오12세 Leo PP. XII 1760~1829 재위1823.09.28~1829.02.10 |
253대 교황 비오8세 Pius PP. VIII 1761~1830 재위1829.03.31~1830.12.01 |
출생
1760년 이탈리아 스폴레토 카스텔로 델라 젠가(Castello della Genga)에서 백작인 아버지 일라리오 델라 젠가(Ilario della Genga, 1703~1767)와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 페리베르티 델라 젠가(Maria Luisa Periberti della Genga, 1734~1811)사이에서 태어났다.
배경
1783년 사제 서품, 1792년 교황 비오6세(Pius PP. VI, 1717~1799, 재위1775~1799)의 개인 비서겸 주교로 서임, 1793년 명의 대주교가 된 다음 동시에 12년간 독일 땅에서 교황 대사로 임무를 수행하는데 당시 유럽을 휩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에 의해 1808년 로마가 점령당하고 교황령까지 합병하면서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가 나폴레옹에게 파문을 선포하고 나폴레옹에게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안니발레는 사실상 교황 대사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퇴선언을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후 몰락하고 이전의 공으로 1816년 추기경에 서임된다. 1823년 콘클라베에서 2/3이상의 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12세로 명명하고 즉위한다. 즉위 후 교황령 내 행정개편을 하고 재정을 개혁하여 교황령 재정을 살찌우지만 1825년 희년 선포로 로마 시민에게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면서 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1822년 교황령 내 발생한 천연두로 인해 천연두 백신 접종이 의사들 사이에서 접종 권고를 하면서 1824년 시민들에게 무료로 백신을 접종하게끔 윤허하여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훨씬 더 빨리 천연두를 근절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 교황이다. 교황즉위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선종전까지 직무를 수행하다가 1829년 69세로 선종한다.
성직
1773년 13세가 되었을 때 오시모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가 기초 교육과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성직자가 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어 그사이 피체노 대학, 캄파냐 대학등에서 신학공부를 한 다음 1782년 부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1783년 사제 서품을 받는다. 더욱이 1790년 신성로마황제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 재위1765~1790)가 승하하면서 이를 기념할 추도사로서 빈에 가서 뛰어난 언변으로 세간의 주목을 이끌게 된다. 1792년 교황 비오6세(Pius PP. VI, 1717~1799, 재위1775~1799)의 개인 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이듬해 1793년 명의 대주교(특정 교구를 맡지 않고 주교의 권위를 유지하는 성직자계급)에 오르고 동시에 쾰른 교황 대사가 되어 활동하는데 독일 땅에서만 12년을 보내면서 뮌헨, 드레스덴, 빈, 뷔르템베르크등의 궁정에서 종교활동뿐만아니라 여러 활동을 하는데 이들의 주장으로는 안니발레에게 사생아가3명 있었다는 주장까지 있다. 당시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로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같은 뛰어난 군인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뛰어난 용맹술과 지휘능력등으로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교황령이 해제되면서 안니발레는 사실상 포로로 간주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어 수년을 보내고 풀려났다가 1805년 3차 대프동맹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프로이센을 설득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는 안니발레를 프로이센 왕국에 보내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1840, 재위1797~1840)에게 파견보내지만 별 효과는 없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Napoléon Ier, 1769~1821, 재위1804~1814, 1815)는 1808년 로마를 점령해버리고 교황령을 합병해버리면서 이에 반발한 비오7세는 1809년 맞불로 나폴레옹에게 파문을 선포하면서 비오7세가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어 사보나(Savona)에 구금되는 수모를 겪게 되면서 안니발레는 교황 대사직을 사임하고 스스로 몬티첼리 수도원에 들어가 사실상 은퇴를 선언한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잠시 프랑스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여러번 실수로 인해 면직처분당하는등 사고도 있었지만 1816년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교황 비오7세로부터 추기경에 서임된다.
1823년 콘클라베
교황 비오7세(Pius PP. VII, 1742~1823, 재위1800~1823)가 1823년 선종하면서 콘클라베가 열린다. 26일간(1823.09.02~1823.09.28)지속된 콘클라베에 53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이 참석하는데 4명이 불참하여 49명이 투표에 참여하였고 여러 추기경들이교황 후보로 거론된다. 이중 안토니오 세베롤리 추기경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1세의 거부권행사로 인하여 후보에서 사실상 제외되고 나머지 인물들끼리 투표가 이루어진다.
생몰년도 | 비고 | 선출 여부 | |
안토니오 세베롤리 Antonio Gabriele Severoli |
1757 ~ 1824 |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1세(Franz I, 1768~1835, 재위1792~1806, 1806~1835)의 거부권으로 후보 제외 | 후보제외 |
프란체스코 카스티글리오니 Francesco Saverio Castiglioni |
1761 ~ 1830 | 미래의 비오8세(Pius PP. VIII, 1761~1830, 재위1829~1830) | X |
줄리오 마리아 카바찌 델라 소말리아 Giulio Maria Cavazzi della Somaglia |
1744 ~ 1830 | 교황청 국무장관, 종교재판소 장관, 추기경 단장 | X |
안니발레 세르마테이 델라 겐가 Annibale Sermattei della Genga |
1760 ~ 1829 | 교황청 총대리 | 교황 선출 (레오12세) |
26일간의 수십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2/3이상인 34표를 얻은 안니발레 세르마테이 델라 겐가 추기경이 선출된다. 교황명은 레오12세로 명명하고 즉위하게 된다.
교황
안좋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레오12세는 즉위한 이후 외교업무를 콘클라베 때 경쟁했던 줄리오 마리아 카바찌 델라 소말리아(Giulio Maria Cavazzi della Somaglia, 1744~1830)추기경에게 위임하고, 여러 행정 개편을 시도한다. 검소한 레오12세는 교황령의 재정을 확실하게 관리하기위해 비용을 절감하고 세금을 줄이고 여러 사업을 시행하면서 재정을 확충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나름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중에 1825년 희년이 펼쳐지면서 이를 기념하기위해 많은 비용이 사용되게 되는데 더욱이 1825년 당시는 유럽 전체가 프랑스 혁명이후 혁명사상이 전파되고 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유럽 전역이 혼란스러워서 자칫 로마의 질서가 어지러울 수도 있었는데 이를 강행한 레오12세는 희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희년 기념 행사로 인해 로마 시민에 가해진 혹독한 재정적 부담과 더불어 희년선포후 1년간 모든 시설이 희념을 기념한 영적 시설로 변모하게 되면서 경제활동에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822년부터 교황령에 퍼진 천연두가 이어지면서 천연두 백신 접종을 권고하는 의료진들이 늘어나면서 1824년 교황 레오12세 역시도 이러한 백신접종을 권고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무료로 백신접종을 실시할 의무를 가지게 하되 자유로운 관리 의무를 유지하는 것으로 질서유지에 성공하게 된다. 다른 유럽국가들이 1840년 이후부터 무료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빠른 움직임을 보여 천연두를 근절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다.
선종
1829년 즉위전부터 좋지 않던 건강이 악화되어 2월 10일 선종하는데, 선종하기전까지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